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린 열린우리당의 386 형님들에게 ‘친구 유시민’을 말하다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종이 신문은 외면했지만, 지난주 내내 인터넷에서는 유시민 의원이 스타가 되었다. 요즘은 둘 다 바빠서 통 볼 수 없는 처지지만, 그와 나는 대학 동기다. 유시민군이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는 그에 대한 마음의 빚이 있다. 386 의원들이 벌떼처럼 그의 말투와 ‘싸가지’ 없음을 비난해도 이 기억이 있는 한 나는 386 의원들의 비판을 수긍하지는 못할 것이다. 유시민이 그 유명한 ‘항소이유서’에서 “잊을 수 없는 그 봄”이라 단 한 줄로만 표현했던 1980년 5월의 일이었다.
한홍구와 유시민, 양치기 소년이 되다
△ 유시민을 향한 비판들은 민주당 경선 과정 때 노무현을 향했던 비판과 닮았다. |
벌써 25년 전의 일이라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겠지만, 광주 학살이 벌어지기 1주일 전쯤인 5월11일이나 12일이었을 것이다. 이른바 ‘서울의 봄’ 당시의 복잡했던 정세를 여기서 설명하려면 너무 복잡해지니 간단히 넘어가기로 하자. 당시 서울대에서는 학생들이 거리로 나가기에 앞서 학내에서 농성 중이었다.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주기를 고대하고 있던- 그래야 ‘혼란’이 조성되고 군이 출동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고 생각했기에- 군부에서는 학생들을 자극하기 위해 여러 가지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공작을 벌이기도 했다. 계엄군(10·26 사건 당시 선포된 계엄령은 당시에도 살아 있었다)이 먼저 학교로 쳐들어와 학생들을 잡아갈 거라는 흉흉한 소문도 많이 돌았다.
그날 서울대에서는 300∼400명의 학생들이 철야 농성을 하면서 학교를 지키고 있었는데, 밤 9시가 지나 학생회 사무실로 여러 곳에서 주로 기자라고 하면서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 밤 군이 출동한다는 긴박한 정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보안사의 역정보였던 것 같다. 나는 그날 무슨 일 때문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학생회 주변에서 왔다갔다 하고 있다가 유시민군을 만났다. 그는 당시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으로 그날 당번이 되어 농성을 이끌던 중이었다. 그날따라 복학생 선배들도 4학년 선배들도 보이지 않았는지, 그는 군이 쳐들어온다는데 농성 중인 학생들을 어떻게 해야 하냐고 의견을 물어왔다. 군이 쳐들어온다는 게 확실한 정보라면 1·2학년이 대부분인 농성 학생들을 빨리 해산시켜야지 별수 있겠는가? 힘든 결정이야 그의 몫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답했던 것 같다. 아무튼 유시민군은 해산 결정을 내렸고, 우리는 학교를 빠져나왔다.
그런데 그날 밤 늑대는 오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양치기 소년이 되어버린 유시민군과 나는 다음날 아침 7시 조금 넘어 몇몇 친구, 선배들과 함께 학교에서 만났다. 민망하고 쪽팔려 그저 얼굴만 쳐다보며 웃기만 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날 아침 강의실마다 돌아다니며 양떼를 쫓아버린 전날 밤의 소동에 대해 사과와 해명을 하느라 혼이 났다. 그리고 5월14, 15일 가두시위에 이어 유명한 서울역 회군이 있었고, 운명의 5월17일이 왔다. 그날도 나는 무슨 일인지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 대낮에는 이화여대에서 각 대학 총학생회장들의 회의가 경찰의 습격을 당해 참석자 대부분이 연행되는 상황이 발생했고, 학교로는 시시각각 군부대의 이동에 관한 제보가 빗발쳤다. 각 언론사 출입기자들도 오늘 밤 상황 발생이 100% 확실하다고 했다.
밤 10시가 다 되어 학교를 나오다가 유시민군을 만났다. 빨리 나가자는 말에 뜻밖에 그는 자기는 학교에 남겠다고 했다. 어떻게 군인들에게 텅 빈 학교를 내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일단 피해야지 무슨 얘기냐는 내 말에 유시민군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본의 아니게 양치기 소년이 됐던 그날, 학생회의 책임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던 나는 그저 민망한 일로 여겼던 반면, 대의원회 의장인 그는 군인들이 의기양양하게 텅 빈 학교에 주둔하는 광경을 그렸던 것이다. 망해가는 나라에서 황현과 같은 선비가 목숨을 끊은들 그게 대세에 무슨 영향이 있겠냐마는, 황현처럼 목숨을 끊는 선비 하나 없었다면 조선의 망국이 얼마나 더 참담했을까? 유시민군을 남겨두고 통금이 다 되어 집에 들어와 텔레비전을 켜니 긴급 뉴스로 비상계엄 전국 확대의 소식이 나오고 있었다. 그 뒤로 나는 현실에서건 역사에서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일을 보게 될 때면, 광주 학살의 전야에 그 넓은 관악캠퍼스의 불 꺼진 학생회관에 홀로 남은 유시민을 떠올렸다. 스물두살 어린 나이의 그는 다가오는 카타필라의 굉음을 들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어떻게 '폭력학생'의 대명사가 됐나
유시민군을 다시 본 건 두달쯤 흐른 뒤였다. 전두환 일당의 ‘자비’ 덕에 그는 감옥에 가지 않고 군대에 가게 된 것이다. 유시민군은 합동수사단에서 풀려난 지 며칠 만에 입대했는데, 친구 몇몇과 함께 유시민군을 만났다. 합동수사단에서 엄청나게 고생했다는 소문에 걱정했지만, 생각 밖에 그의 표정은 밝았다. 신경림 선생 시처럼 못난 놈들은 얼굴만 봐도 반갑다고 만나자마자 우리는 낄낄댔다. 철이 없어서였는지 위로해줄 말을 찾지 못해서였는지 우리는 유시민군에게 군대 가서 잔뜩 ‘좇뺑이’ 치라고 위악을 부렸고, 유시민군은 “흥, 인생만사 새옹지마야. 니들은 무사히 졸업할 것 같냐”며 지지 않고 응수했다. 하느님이 계엄포고령을 위반한 죄로 계엄군이 된 불쌍한 유시민군의 소원(?)을 들어주셨는지 우리도 그해를 넘기지 못했다. 1980년 12월에 이른바 ‘무림 사건’이 발생했고, 군대 가는 유시민군을 놀렸던 악동들은 줄줄이 감옥과 군대에 가게 되었다. 유시민군은 친구라도 만나고 군대에 갔지만, 우리들은 수사기관에서 그대로 군대에 직행했다. 그래도 억울할 것은 없었다. 친한 친구들은 그때 다 같이 잡혀서 보안사에서 같은 버스 타고 군대에 갔으니까.
유시민군이 말한 대로 인생만사는 역시 새옹지마였다. “니들은 무사히 졸업할 것 같냐”던 그의 ‘악담’은 부메랑이 되어 그 자신에게 돌아갔다. 친구와 선배들이 줄줄이 엮인 무림 사건이 터지자 이등병이었던 그도 무사하지 못했다. 보안사에 끌려간 그는 밖에서 일을 저지른 우리들보다 더 심하게 당한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군대를 반년 정도 늦게 갔지만, 제대는 오히려 유시민군보다 빨리했다. 전두환 일당의 ‘자비’ 덕에 우리는 제적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학에서의 군사 교련 이수로 인한 6개월 복무 단축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반면, 유시민군은 33개월을 모두 채우고 만기 제대한 것이다. 그런데 전두환이 정권을 찬탈한 뒤 처음으로 단체로 군대에 끌려간 우리의 제대를 앞두고 악명 높은 녹화사업이 실시됐다. 나는 정말 운좋게 사단 보안대에 15일 잡혀가서도 프락치 공작을 강요받지도 않고 뺨 한대 맞지 않고 재미없는 정훈서적 읽는 것으로 녹화사업을 마친 반면, 유시민군을 비롯한 많은 친구들은 “일신의 안전을 위해 벗을 팔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당하는 가장 비인간적인 형태의 억압”을 당해야 했다. 유시민군은 그 자신이 고백한 것처럼 “보안대에 대한 공포감을 이겨내지 못하여 형식적으로나마 그들의 요구에 응하는 타협책으로써 일신의 안전을 도모”하게 되었고, 그 결과 엄청난 양심의 고통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 군대 시절의 유시민. 강제 징집된 그는 군대에서 다시 한번 '무림 사건'에 휘말려 곤욕을 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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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일으켜세운 것은 비슷한 시기에 녹화사업을 받은 여섯명의 젊은이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언제까지나 자신의 비겁을 부끄러워할 수 없었던 그는 녹화사업의 중단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였고, 1984년 9월 제적학생 복교 조치가 있자 학교로 돌아와 복학생협의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유시민의 복학생 생활은 보름을 넘지 못했다. 이른바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때 참 프락치도 많았고, 가짜 학생도 많았다. 그런데 프락치 공작에서 진짜 무서운 건 프락치가 적에게 물어다주는 정보보다도 프락치 침투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 때문에 운동 진영이 스스로 자살골을 넣게 된다는 점이다(시기와 무대는 다르지만, 내 박사학위 논문이 이 문제를 다룬 것이다).
박정희의 유신 시절에는 기관원(우리는 그들을 ‘짭새’라 불렀다)과 전경들이 공공연히 학내에 상주했다. 교정의 벤치란 벤치는 그들이 모조리 점령하고 있었고, 손바닥만 한 빈 공간은 전경들이 족구나 팩차기를 하는 놀이터가 되었다. 전두환 정권 이후 경찰이 이런 식으로 교내에 상주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경찰의 프락치는 엄청나게 늘어났다. 게다가 졸업정원제가 실시되면서 학생 수가 늘어나 같은 과 학생끼리 서로 얼굴을 모르게 되면서 가짜 학생도 덩달아 많이 늘어났다. 기관원을 사칭하는 가짜 학생에게 여학생들이 교내에서 성추행을 당하는 일이 여러 대학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가짜 학생 또는 학생 신분이 아닌 사람이 적발되면 일단 그가 정보부나 경찰의 프락치가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형편이었다. 대단히 잘못된 것이지만, 학생들이 이런 사람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왕왕 폭력이 행사됐다. 그 중의 한명이 몹시 심하게 얻어맞았는데, 당시 학생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한 전두환 정권은 이 사건을 학생운동의 도덕성에 결정적인 손상을 가할 기회로 활용하고자 했다. 마침 그를 직접 폭행한 친구가 복학생이었기 때문에 복학생협의회 의장이던 유시민군이 총학생회 간부들과 함께 구속됐는데, 죄명은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이었다.
군사정권하에서 학생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만, 다들 긴급조치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계엄포고령, 반공법, 국가보안법 등 ‘뭔가 있어 보이는’ 법률 위반으로 감옥에 갔지 ‘폭처법’ 위반으로 감옥에 간 것은 처음이었다.
회심의 반격, 항소이유서
저들도 학생운동을 정치적 법률로만 탄압하면 오히려 영웅으로 만들어준다고 생각했는지 ‘프락치 사건’을 대대적으로 활용하여 학생운동의 폭력성과 과격성을 집중적으로 부각했다. 경위야 어쨌든 폭력이 행사되고 사람이 다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학생운동은 꼼짝없이 당하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아니, 사람 좀 친 것 갖고 학살 정권, 고문 정권이 저럴 수 있느냐며 분개하기도 했지만, 남의 허물이 내 잘못을 덮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저들의 선전 공세에 분하고 억울하지만 속절없이 당하고 있을 때 회심의 반격을 날린 것은 바로 폭력과격 학생의 대명사가 돼버린 유시민이었다. 여기 몇줄로 줄여서 소개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명문인 ‘항소이유서’를 통해 유시민은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러시아 시인의 말을 빌려 “조국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로서 학생운동의 도덕성을 옹호했다. 이 글이 어떤 글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종종 “원래 착한 유시민이 군사독재의 모략에 맞서 ‘독한 마음’ 먹고 착한 모습을 보인 글”이라고 농반진반 말하곤 했다.
스물일곱살의 유시민이 쓴 ‘항소이유서’는 그 뒤 칼럼니스트로서, 방송인으로서, 저술가로서의 눈부신 활동에도 불구하고 유시민을 규정하는 꼬리표가 되었다. 그리고 17년이 지난 2002년 여름 그는 “바리케이드 앞에 화염병을 들고 다시 서는 심정”으로 또 하나의 격문을 날렸다. 정규군이 지리멸렬 무너지자 그가 의병의 깃발을 내걸고 뛰쳐나간 것이다. 사람들이 적당히 잊어버려야 역사이야기에 쓸 수 있을 터이지만, 이 일은 너무 가까운 과거의 일인지라 역사에 편입시키기에는 생뚱맞아 보인다. 그렇지만 여의도에 있는 이른바 386 의원들은 집단 기억상실증에 걸렸는지 불과 2∼3년 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 "열린우리당의 젊은 의원들이여, 쉽게 잊혀지지 않으려거든 철들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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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미애·김영환처럼 잊혀질 것인가
싸가지 없고, 독불장군이고, 독선적이고, 말을 함부로 하고, 동지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하고, 당내나 원내에는 지지세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인터넷에서만 극렬 지지세력들을 갖고 있고, 인간이 가볍고, 정통 세력이 아니고… 꼭 3년 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에서 노무현 후보를 두고 나왔던 말이다. 유시민이 노무현이 아니지만, 그에게 가해지는 비판은 너무 신기할 정도로 똑같다. 어떤 386 의원은 유시민을 두고 지지의원이 다섯명도 안 되는데 당의장 경선에 왜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비아냥거리지만, 기억하는가, 노무현이 경선에 나왔을 때는 노무현 본인도 국회의원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그의 곁에는 단 한명의 의원도 없었다. 한때 같은 변호사 사무실에 있었던 천정배 의원이 그나마 노무현을 지지했고, 김근태 후보가 경선을 접은 뒤 그의 캠프에서 옮겨간 이재정 의원이 노무현 후보의 옆을 지켰다.
독자들이 이 글을 볼 때쯤이면 열린우리당 경선도 다 끝났을 텐데 내가 굳이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유시민의 옛 친구라서도 아니고, 정치인 유시민이 당의장이 되는 것을 바라서도 아니다. 열린우리당 경선 과정을 보면서 너무 빨리 어른이 돼버린 386 의원들에게 한편으로는 크게 실망하면서, 그래도 독수리 5형제 세대의 막내인 젊은 그들의 앞날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탄핵 직후 인터넷을 떠돌며 사람들 반 죽도록 웃게 만든 ‘아무개 의원의 탄핵일기’ 한 구절이 생각난다. “잘나가는 정치인 말아먹는 기계… 동전만 넣으면 멀쩡한 인간이 깡통처럼 구겨져나오는 그 깡패 같은 넘 땜에… 그 넘 땜에 폐인된 유능한 정치인이 어디 한둘인가….” 솔직한 이야기로 탄핵에 가담한 민주당에도 참 아까운 인물들 많았다. 지금 그들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지난해부터 노안이 오기 시작해서 그런지 자꾸 나이를 따지는 글을 쓰게 되어 젊은 독자들께 죄송스럽다. 386이나 유시민군이나 나나 이제 같이 늙어가는 처지인데, 386 의원들이 너무 빨리 어른이 돼버려 아직 철이 덜 난 유시민이나 나 같은 사람들이 이제 그분들을 형님으로 모셔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마저 든다. 의원이 되었기 때문에 어른이 된 것인지, 아니면 숱한 386 중에서도 일찍 어른이 된 의장님, 회장님들만 의원이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리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내가 독자들이 이 글을 볼 때쯤이면 열린우리당 경선도 다 끝났을 텐데 굳이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유시민에게 어떤 도움을 주자는 것이 아니다. 유시민을 오래 알고 지낸 사람으로서 386들이 유시민의 어떤 점 때문에 거품을 무는지도 요즘 말로 안 봐도 비디오다. 그러나 유시민을 비판하는 386 의원들에게 꼭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유시민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의 반의 반만큼이라도 수구에게 날을 세워 싸워봤느냐고….
학생운동의 역사를 볼 때 세대로서의 386은 너무 겉자랐다. 민간인 학살의 광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서 1950년대도, 60년대도, 70년대도 학생운동이 너무 많은 짐을 져야 했다. 그러나 광주를 거치면서 과대 성장한 국가기구의 대표선수인 군과 발육이 부진한 시민사회의 대표선수인 학생이 가장 첨예하게 격돌했던 80년대만큼 학생운동에 많은 짐이 지워진 적은 없었다. 90년대 이후 학생운동이 급격히 쇠퇴했다고 하지만, 사실 이는 학생운동 출신들이 다른 분야에 축적돼가면서 다른 부문의 운동이 성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민족민중운동의 상황이 이제 386 의원들처럼 의장님, 회장님 출신의 스타가 나오기는 어려워졌다. 독수리 오형제의 막내인 386들이 김문수, 이재오가 돼서는 안 되고, 추미애나 김영환처럼 나름대로 대단한 활약을 하다가 하루아침에 잊혀져서도 안 되지 않은가?
철들지 않고 살면 즐겁지요
앞서 태어난 조카는 있어도 앞서 태어난 아우는 없다지만, 조폭 세계에 가면 나이 어린 형님을 모시는 경우가 왕왕 있다고 한다. <파이란>의 최민식처럼 늙다리 조폭 생활을 하다 보면 젊은 형님에게 굼뜨다고 야단맞기도 하는데, 이런 때 울컥 치미는 말이 있다. “형님도 내 나이 돼보슈.” ‘오지혜가 만난 딴따라’에서 오지혜가 윤민석에게 한 말을 나는 유시민에게, 그리고 너무 빨리 어른이 돼버린 386 모두에게 하고 싶다. 제발 철들지 말고 살라고…. 아는 의사에게서 철들지 않은 걸로 치면 거의 정신병 수준이라는 말을 칭찬으로 알았다는 하종강 형님 같은 분도 있지 않은가? 한국 사회처럼 점잔 빼는 사회에서 나이 들어 철들지 않고 산다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너무 빨리 어른이 돼버린 386 형님들도 이 나이가 돼보신다면, 유시민처럼 철들지 않고 사는 사람들의 즐거움 또한 꽤나 쏠쏠하다는 것을 아실 날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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