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노무현 시민학교 문짝님 강연 메모

우렛소리 2009. 9. 25. 21:55
노무현 시민학교 문짝님 강연메모
글쓴이 : 메모
출처 : 유시민을 믿고 지지하는 참여시민 네트워크, 시민광장

들어가며 (사회 : 김만수 前 청와대 대변인)
안녕하십니까? 시작하기 앞서 먼저 여러분들에게 알려드릴 것이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회고록이 출간되었는데, 이전에도 대통령님에 대한 책이 여러 권 나왔지만 이 책은 대통령님이 직접 쓰신 회고록입니다. 그래서 저자도 '노무현'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책이 대통령님의 육필로 쓰여진 마지막 책일 것입니다.
그리고 9월 24일 오후 2시에 생가복원식이 있을 예정입니다. 사저 앞에 작은 생가를 복원하는데요. 앞으로 찾아오시는 분들이생가도 보시고 묘역도 둘러보시고 참배코스가 될 것입니다. 또 노무현 재단이 출범하였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강연
장하진 원장님이 처음에 강연을 하라고 주문하셨을 때 “못한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하도 하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습니다. 원장님은 아마도 제가 2002년 대선 때 했던 연설도 있고 해서 저한테 부탁하신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제 인생에서 그 때 2년 딱 띠어서 민족사에 봉사한다. 그런 생각으로 했었습니다.
왜 노무현이어야 하는가.
그 생각만 한 2년 하고 꿈에도 노무현 후보가 나타나기도 하고 했었습니다. 그때는 온통 어떻게 잘 설득할 수 있을까 생각만 했었습니다. 그런데 선거 끝나고 본업에 돌아가 보니까 2년 동안 연기자 성질이 다 날라 갔더라구요. 연기자는 생각하는 게 아니고 느껴야 하는데 느끼는 기능이 확 없어진 것이죠. 그래서 다시 가요를 들으면서 울기도 하고, 술도 마시고… 그러면서 느끼는 연습을 다시 하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참여정부가 시간이 지나면서 고통을 받고 있으니까. 저 때문에 혹시라도 참여정부가 흠집이 있을까봐... 스크린 쿼터로 싸울 때도 암말 안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 말을 안하고 있었는데… 왜 반대 안하느냐고 그러기도 하고. 그래서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좋겠다. '잠적'을 한 것이죠.
그 때 연설한 것은 2년 동안 갈고 닦아서 그 때 그렇게 한 것이지, 그 후에 5년 동안 제가 참여정부에 행정에 참여한 적도 없고, 정치에 들어가 보지 않아서 참여정부에 대해 거의 모른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그래서 제가 못하겠다고 생각했는데,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에 1기 강좌이기도 하고 하도 강권을 하셔서 나오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후에 받은 충격은 여러분처럼 똑같을 겁니다. 그런데 충격이 좀 가시고 나니까.
'노무현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참여정부는 뭘 했나?'
'그렇다면 앞으로 무엇을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앞에서 다른 분들이 안한 얘기를 풀어보려고 합니다.
오연호 기자가 노무현 대통령 연설 중에서 가장 인상깊은 연설로 2002년 대선후보출마연설을 꼽았습니다.
참고자료 #1
조선 건국이래로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번도 바꿔보지 못했다.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은 전부 죽임을 당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다. 패가망신했다.
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저 밥이나 먹고 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있어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척하고 고개숙이고 외면했어야 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제 어머니가 제게 남겨주었던 제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맞는다.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 보면서 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가 감옥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넘치는 우리의 젊은 아이들에게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맞는다.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번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 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이야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
저도 그 연설을 하실 때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그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몰랐었습니다.
그 연설 자리에 있었지만 지금 와서 다시 읽어 보고 새롭게 느꼈습니다.
노무현 후보를 처음 만나뵌 때가 1989년 문목사 변호인단을 구성할 때였습니다. 당시 문목사가 DJ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했었기 때문에 주로 평민당만 있었고 해서 노무현 변호사를 찾아갔었습니다. 그런데 가서 말씀을 드리니까.
'뭐 생각해 보겠다' 이럴 줄 알았는데 흔쾌히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는데 이해찬 의원도 들어오고 셋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던게 처음 뵌 기억입니다.
노무현 후보의 특징이라면 뭘 하자든지 아니면 뭐 안했으면 좋겠다 제안할 때… 음… 뭐라고 말하기 참 어려운데… '존재를 던져서' 질문을 하세요. 온 몸 자체로 물어보십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라는 식으로.. 멈칫멈칫 놀랄 때가 있어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제가 말을 할 때도 심사숙고해서 말하게 됐죠.
참여정부에서 있었던 큰 일을 꼽아보자면.
첫째가 족벌신문과의 싸움.
둘째가 지역대결 구도를 깨기 위한 대연정 제안.
셋째가 FTA.
이런 것들일 것입니다.
분석해 보면, '내가 이 양반을 연기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봤습니다. 예전에 연기자로서 연기자질이 없을꺼 같아서 연기자를 포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연기자 선생님과 독백훈련을 했었습니다. 마침 신영복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했었는데, 그 책에 '죄수의 이빨' 이라는 편지글인데…
참고자료 #2
죄수의 이빨
계수님께
치과에 가서 이빨을 뽑으면 뽑은 이빨을 커다란 포르말린 유리병에 넣습니다. 얼마 동안이나 모았을까 두어 됫박은 족히 됨직한 그 많은 이빨들 속에 나의 이빨을 넣고 나면 마음 뒤끝이 답답해집니다. 지난번에는 물론 많이 흔들리는 이빨이기도 했지만, 치과에 가지 않고 실로 묶어서 내 손으로 뽑았습니다. 뽑은 이빨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어느날 운동시간에 15척 담 밖으로 던졌습니다. 일부분의 출소입니다. 어릴 때의 젖니처럼 지붕에 던져서 새가 물고 날아갔다던 이야기보다는 못하지만 시원하기가 포르말린 병에 넣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10년도 더 된 이야깁니다만 그때도 치과에 가지 않고 공장에서 젊은 친구와 둘이서 실로 묶어 뽑았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담 곁에 갈 수가 없어서 바깥으로 내보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궁리 끝에 마침 우리 공장에서 작업하고 있던 풍한방직 여공들의 작업복 주머니에 넣어서 제품과 함께 실려 내보낸 일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아무리 종이로 예쁘게(?) 쌌다고 하지만 '죄수의 이빨'에 질겁했을 광경을 생각하면 민망스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나는 징역 사는 동안 풍치 때문에 참 많은 이빨을 뽑았습니다. 더러는 치과의 그 유리병 속에 넣기도 하고, 더러는 교도소의 땅에 묻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담밖으로 나가기도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비단 이빨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이 곧 우리들의 심신의 일부분을 여기, 저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나누어 묻는 과정이란 생각이 듭니다.
무심한 한마디 말에서부터 피땀어린 인생의 한 토막에 이르기까지 혹은 친구들의 마음 속에, 혹은 한 뙈기의 전답(田畓) 속에, 혹은 타락한 도시의 골목에, 혹은 역사의 너른 광장에……, 저마다 묻으며 살아가는 것이라 느껴집니다. 돌이켜보면 나의 경우는 나의 많은 부분을 교도소에 묻은 셈이 됩니다. 이것은 흡사 치과의 포르말린 병 속에 이빨을 담은 것처럼 답답한 것이기도 합니다.
교도소가 닫힌 공간이라면, 그래서 포르말린 병처럼 멎은 공간이라면 그러한 느낌도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 돌이켜보면 교도소는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진 곳이 아닐 뿐 아니라 도리어 우리 사회, 우리 시대와 가장 끈끈하게 맺어져 있는, 그것의 어떤 복판을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피라미드를 거꾸로 세웠을 경우 그 꼭지점이 땅에 닿는 자리, 즉 피라미드의 전 중압(全重壓)이 한 점을 찌르는 바로 그 지점에 교도소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교도소는 사회의 모순 구조와 직결된 공간임으로 해서 전 사회를 향하여 활짝 열려 있는 공간이라 믿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도소에 묻은 나의 20여 년의 세월이 쓸쓸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인가. 포르말린 병의 그 답답함이 연상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징역살이라 하여 한시도 끊임없이 내내 자신을 팽팽하게 켕겨놓을 수도 없지만 어느새 느슨해져버린 의식과 비어버린 가슴에 새삼 놀라게 됩니다. 이것은 깨어 있지 못한 하루하루의 누적이 만들어놓은 공동(空洞)입니다.
피라미드의 전 중압이 걸려 있는 자리에서 나타나는 의식의 공동화(空洞化) ― 역시 교도소가 만만치 않음을 실감케 합니다.
묻는다는 것이 파종(播種)임을 확신치 못하고, 나눈다는 것이 팽창임을 깨닫지 못하는, 아직도 청산되지 못한 나의 소시민적 잔재가 치통보다 더 통렬한 아픔이 되어 나를 찌릅니다.
계수님께 편지 쓸 때면 으레 약간의 망설임이 없지 않습니다. 징역 이야기만 가득한 나의 편지가 계수님의 생활에 무엇이 되어 나타나는지, 공연히 계수님의 방 창유리나 깨뜨려 찬바람 술렁이게 하는 것이나 아닌지, 걱정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계수님의 편지와 그 편지에 실려오는 계수님의 면모와 생활자세는 이러한 나의 망설임이나 걱정을 시원하게 없애줍니다.
- 1987년 5월 28일, '신영복의 '나는 걷고 싶다' 중에서
혼자 의자에 앉아 독백으로 말하는 훈련이었는데 연기자 선생님이 '참 좋은데...이게 뭐냐' 물어보시길래, 신영복 선생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서울대 나와서 육사 교관을 하다가 간첩사건으로 20년간 옥살이를 한 분이다... 라고 설명을 하니까. 하시는 말씀이 다 잊어먹고 '억울하다'는 느낌만 가지고 해보라고 했습니다. 20대 후반에 평등사회를 꿈꾸다 20년을 감옥에서 말 그대로 청춘을 다 보냈는데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래도 그가 느꼈을 고통 생각 이런 거 다 필요없이 그냥 '억울하다' 이것만 가지고 해 보라는 겁니다.
사실 감옥 생활이라는 게 영양불균형이 커서 먼저 이가 다 빠집니다. 문목사도 밥 먹다가 콩 설 익은 게 있으면 어금니 부러지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편지글을 '억울하다'는 느낌만으로 읽는데 세 문장도 읽지 않았는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아주 슬프고 힘들어서 우는 울음이 아니고 조용히 편안하게 하는데 눈물이 한없이 흘러요.
신영복 선생님과 같은 생각을 하는 건 다음 문제입니다. 이 분의 마음을 느끼는게 최선입니다. 그 이후로 책을 읽을 때 저자의 정서 상태를 느끼면서 읽게 되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이 분의 마음은 무엇일까? 핵심은 무엇일까?'
가만보면 노무현 대통령은 '법률가' 이면서 '학자적 풍모'가 있는 분입니다. 법률가로서 옳고 그름을 따지고 3류학자들이야 표절하고 자기복제하는데 정신이 없지만 제대로 된 학자라면 기존 학설이 맞는지 의심해 보고 뒤집어 보고 맞으면 따르고 틀리면 새로 만들고 … 하는 것처럼 이해되고 동의되고 그러면 옳은 것을 실천하겠다하는 학자적 풍모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그 과정에서 불의와 거짓, 위선에 대해 온 몸으로 분노를 느꼈고 실천했던 불의에 굴복하지 않은 '용맹성'도 있습니다. 요점으로 줄인다면, 이해와 동의는 '이성'의 측면에서 이성의 힘은 '용맹성'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영복 선생은 '억울함'이었다면, 노무현은 '분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분의 핵심적인 정서상태는 '분노'가 아닐까? 내가 연기할 수 없는 분이구나 생각했습니다. 박정희나 전두환은 느낌들을 생각해 보죠. 한 분 한 분. 그러나 노무현은 연기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못된 일에 대해 분노를 느끼는 게 왜 그렇게 어렵나면 … 연기 훈련이라는 게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유치원 전에 4~5살 아이들이 노는 걸 보면 남녀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쇼파 위에서 다리 벌리고 다 잘 놉니다. 이게 초등학교를 입학하면 부모들이 딸에게 다리 오므리라고 합니다. 신체에 제약이 생기는 것이죠. 남자 아이는 울면 남자가 우냐고 못 울게 합니다. 눈물 흘리지 못하는 남자들이 많습니다. 놀고 싶은데 못 놀게 하니까 일종의 '컴플렉스'가 생기는 것이죠. 틀에 가두는 것입니다.
예전에 MBC 개그 프로그램에 보면 조춘이라고 있습니다. 쌍라이트. 잘 가고 있는데 김형곤 뒤통수를 딱 때리면 확 돌아보고 화를 내야 되는데 화를 못 내죠. 쌍라이트니까. 저항을 못합니다. 외부 충격이 왔을 때 자연적으로 분노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DJ에 대해 나쁜 신문들이 욕을 합니다. 뒤통수 맞는 것이죠. 욕을 해야 되는데 … 뒤돌아 서서 욕을 해야 하는데 욕을 했다가는 국회의원도 못할 꺼 같고 그래서 안하는 … 그런거죠.
미국 대학들의 연기학교는 처음 들어가면 1년 동안은 그냥 내버려두고, 3학기 들어가서 발전이 없으면 짜릅니다. 40명이 15명 10명 이런식으로.. 줄어듭니다. 1년 반 지나서 잘린 학생들을 보면 하바드생 예일 이런 학생들이 다 떨어져 나갑니다. 느끼지 못하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분노'라는게 느끼면서 화를 내는게 최선의 방법인데 이게 화를 내도 될까? '생각'이 반복되면 익숙해 집니다. '아. 여기서 화를 내야지'. 남이 하는대로 따라 하는 겁니다.
많은 정치인들을 보면 저 분은 '생각'만 하는구나. 그런게 보입니다.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나가는 '반응'이어야 하는데 온갖 뒤틀리는 반응들이 나오고 자기합리화를 하고… 노무현에게 있어서 그게 가장 핵심이 아닐까?
노무현에 대한 작품이 언제 나올 지 알 수 없지만 저는 지원할 재간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노무현에 접근하는 문고리라고 할까요? 너무나 뻔해서 다른 강사분들이 얘기 안하는 것으로 해볼까 합니다.
우리 정치를 해석하고 우리 사회를 어떻게 인식하고 시민이 전진하는 만큼 나라가 발전한다는 말처럼 어떻게 조직할 것이고 왜 그런가에 대해서 말해보려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언급 중에서 왜 언론과 싸우느냐는 질문을 받자 했던 대답이 '나는 언론과 조우했다'고 했고, '그렇다면 내가 민주주의를 하지 말았어야 했는가'는 대답이 인상 깊었습니다. 최근 미디어 악법을 날치기로 처리한 것을 보면서 저게 정당이 맞나? 국민들 60%가 반대하는 법을 저리 무리하게 처리하고 싶을까? 족벌신문이 강요했다고 봐야죠. 박근혜도 상정이 되면 반대하겠다고 했다가 2~3일 집중 공격을 받더니 그냥 꼬랑지 내리더군요.
언론과 조우했다는 말이 족벌신문과 한나라당 그런 동맹구조가 형성된 것에 대한 표현이 아닌가 싶습니다. 족벌신문에 대한 그동안 과거는 일제시대부터 하면 너무 많고 87년까지 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YS 대통령 만들기를 하고 YS가 대통령 당선될 날 밤에 신문사 회장집에서 당선 축하연을 했습니다. YS가 못한것도 많지만 뚝심있게 잘 한것도 있습니다. 속된말로 깡다구 있게 … 하나회 제거, 금융실명제 실시, 공직자 재산등록 실시 등인데 언론도 공직으로서 재산등록을 하게 하려 했는데 끝내 관철시키지 못했습니다.
그 때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어보면, 신문사가 청와대를 찾아와서 압박을 하고 정권이 오래가냐 언론사가 오래가냐 하면서 그랬다고 합니다.
결국 세무조사도 했지만 발표도 못하고 그랬습니다. DJ도 신문사 미술관 개관식에 참석하고 신문사 회장님 생일잔치에도 갔습니다. 나중에 논설위원들을 데리고 식사도 하고 독대도 하면서 간곡히 협조를 요청했다 합니다. 결국 협조하지 않았고 세무조사 결과를 발표했었습니다.
YS가 공직자 재산등록에 언론인들을 관철시키지 못한때가 힘의 균형이 전환된 시점이 아닌가 합니다. DJ 당선도 결국 이인제가 표를 갈라서 당선된거고, 그들은 5년 뒤에 정권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노무현 후보에게 일대일 대결에서 지고 말았습니다.
급기야 노무현에 대해 처음에는 '저주와 야유' 이더니 나중에는 '조롱과 능멸'하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족벌신문을 잘 안 봐서 몰랐는데, 어느 날 문득 봤는데 … 제목이 '바보는 늘 언론 탓만' 입니다. 제목이 그렇습니다. 87년 이전 정권의 나팔수 하다가 민주화로 언론자유가 보장된 이후의 행태입니다. 참여정부 때 국정원의 국내사찰이 금지되었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신문사가 정보력에 최고 기관이 되는 것이죠.
한나라당도 족벌신문에 기대고 정보를 얻는 것입니다. 국회에 가보면 대한민국 국회가 맞나 싶어요. 위원회가 수십 개인데 보좌관은 3~4명입니다. 3~4명으로 뭘 하겠습니까? 정보도 없고 … 한계가 뚜렷합니다.
족벌신문이 거의 집권세력화 된 것이죠.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이 관중석에 있을 사람들이 운동장에 내려와 뛰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전에 잘 알고 지내던 친구가 있었는데 부인도 알고 꽤 똑똑한 여자였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저 멀리서 걸어오기에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려고 했었는데 … 오는데 느낌이 이상해요. 눈빛이 파래요. 와서는 하는 말이 노무현이 어떻고 하면서 분노와 저주를 퍼붓는데 무슨 말인지도 모를 정도로 욕을 하고 갑니다.
그래서 언젠가 언론전문가들을 만나서 좀 써달라고 했습니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절 언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국민들이 알게 해 달라고 … 일부 재벌들도 똑같습니다. 과거에 빨리 성장하려고 재벌들 중심으로 한 거죠. 정경유착, 관치금융. 박정희 때도 전두환 때도 국제그룹 공중분해한 것도 그래서 그런거죠.
DJ 때는 IMF 구조조정을 해야 했기 때문에 정권의 말을 들었습니다. 참여정부 와서 정경유착이 해소되었습니다. 자유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벌, 족벌신문들이 국민들이 피땀 흘려 쟁취한 자유 속에서 자기위치, 자기본분을 망각하고 권력을 탐욕스럽게 탐하고 있는 거라고 봐야죠. 민주화를 통해 이뤄낸 자유에 대해, 도움 주기는 커녕 끝없이 발목을 잡고 대한민국 공동체의 발전을 뿌리 채 흔들어 제끼고 있는 형국입니다.
'길 닦아 놨더니 뭐가 지나간다'는 말처럼 그렇습니다. 더 문제는 그 권력이 국민이 선출하지 않는 권력이고 선출할 수 있는 방법도 없는 세습권력이라는데 있습니다.
이명박 정권이 레임덕 오면 슬며시 차기정부에 줄을 대고 곶감 빼먹듯이 또 그럴 겁니다. 족벌신문과 재벌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한나라당은 거기에 뭉뜽그려 가듯 얹혀서 그렇게 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들의 이러한 행태는 특권층의 이익을 위해 하는 행태인데 왜 지지를 받는가?
이익구조 위에 감성구조가 얹혀있기 때문입니다. 지역구도와 빨갱이 구도입니다. 남북관계를 좋게 하자고 해도 좌파라고 하고, 분배를 얘기해도 노동을 얘기해도 빨갱이라고 덧칠을 합니다.
지역구도도 DJ의 인기가 높아서 1971년 대선 당시 국회의장을 했던 이효상이 '전라도 사람은 경상도 사람에게 양말도 안 판다더라'고 하며 지역구도가 시작된거 아닙니까?
참고자료 #3
1963년 대선과 1971년 대선에서 잇따라 '망국적 지역감정'을 조장한 인물이 있다.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이효상이 바로 그 장본인이다.
양대 선거에서 그가 했던 발언 요지를 보면 각각 다음과 같다.
"대구는 신라 천년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고장이지만 임금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 고장 출신의 박정희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아 임금님으로 모시자."(1963년)
"호남에서는 이번 선거에 야당을 뽑을 것이므로 영남에서는 몽땅 여당을 뽑아야 한다."(1971년)
더욱 가관인 것은 이 발언 이후 도리어 이효상이 출세가도를 달렸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1963년 선거 당시 교육자 출신이던 그는 입당한 지 얼마 안 되던 무명의 정치인에 불과했다.
그러나 얼마 후 국회의장에 오르는 등 박정희 정권 하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 '이념'으로 조국이 남북으로 분단된 것도 모자라 또다시 '감정'으로 동서를 반 토막 낸 공적(?)을 높이 평가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지역구도가 40년이 이어져 오니까. 지역 구도를 넘어버렸습니다. 호남에서 DJ를 지지해도 왜 지지하냐 물으면 동향이니까 지지한다고 말하고 싶어도 그렇게 말 못하고 정책이 옳아서 지지한다고 말합니다.
영남에서도 저것들은 빨갱이라서 한나라당 정책이 옳아서 지지한다고 말합니다. 이러다 보니 실제로 호남은 진보가 많아지고, 영남은 보수화 경향을 띠게 되었습니다.
박정희 정권 때 실제로 춘궁기가 넘어갔습니다. 저는 지금도 무말랭이를 안 먹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늘 무말랭이였거든요.
그런 과정에서 세계 유례없는 경제성장을 했습니다. 지금도 물론 양극화, 취업난의 어려움이 있긴 하지만 … 또 부동산이 거의 천문학적으로 폭발했습니다. 남한을 팔면 캐나다를 8번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러면서 국민들 50~60%가 재산가치가 늘어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또 우리나라 자영업자 비율이 38%입니다. 미국은 10%가 안되는데 … 자영업자가 많을수록 사회는 보수화 됩니다. 왜냐하면 자영업은 경기를 많이 타기 때문이고 스스로 사용자이면서 노동자이기 때문입니다.
교육과정에서도 현대사교육이 오랫동안 없었습니다. 예전에 제가 배울때 국사 교과서에 해방 이후가 겨우 5장입니다. 현재 한국사회를 규정하는 95%가 50년~100년입니다. 그런데 그 교육이 없었습니다. 이승만이나 박정희가 현대사를 가르치고 싶었겠습니까? 그래서 386세대가 특이한 겁니다. 이들은 대학에서 집단학습을 한 세대입니다. 우리사회의 3자 동맹… 진보진영에 대해 이야기하면 길어지는데 …
(청중 : 해 주세요~!)
노무현 대통령은 처음에는 안락한 삶을 사는 전문가였습니다. 이후 시민운동을 하다가 정치운동을 하고 이럴꺼면 집권을 하자 해서 집권까지 했습니다. '시민이 전진하는 만큼 나라가 발전한다'라고 말한 까닭이 바로 한국사회에 대한 이해 때문에 그랬을 겁니다.
그럼 앞으로 우리는 뭘해야 하나?
시민주권모임의 성격은 '시민운동'과 '정치운동'이 결합되어져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지금 제가 얘기하는 것은 개인적이고 개인의 의견으로써 제안 드리는 겁니다. 촛불 이후에 이렇게 해도 안되는구나 생각이 있었습니다. 선거로 뽑았으니 어찌하겠습니까? 결국 '대의민주주의의 강화' 일 뿐입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과거 민주당은 DJ가 공천을 장악했었기 때문에 한 번 시켜보고 돈 먹는거 같다든지 하는게 시원찮으면 짜르고, 새 피를 수혈하고 해서 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민주당은 그런 카리스마가 없습니다.
당정도 분리 되었구요. 이런저런 변화를 하려고 하기는 하지만 도토리 키재기입니다. 원래 정당은 당원이 주인인데, 민주당은 당원 명부가 없다시피 한 정당입니다. 또 개혁을 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냥 개혁 안해도 다음 총선에서 수도권에서 상당히 이길 겁니다.
그러니 굳이 개혁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럼 어떻게 민주당의 개혁을 이룰것인가? 사실 국민들은 정당개혁에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그건 너희들이 알아서 해' 입니다. 그런데 하지 않으면 '그것조차 못하는데 어떻게 집권하려고 하느냐?'고 합니다.
민주당은 이렇게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족벌신문을 신문이 아닌 '경쟁자'로 인식해야 합니다.
둘째, 지역구도를 깨뜨릴 수 있는 선거법 개정과 개헌을 묶어서 추진해야 합니다.
셋째, 당원이 주인인 정당이 되어야 합니다.
넷째, 민주정부 10년의 공과를 승계해야 합니다. 임기 말 대통령을 축출했던 배신에 대해서 공개사과라든지 하는 반성이 있어야 합니다.
다섯째, 국민이 만족하지 못한 일자리, 주거, 복지, 양극화의 문제에 집중적으로 노력하는 정당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민주 대 반민주가 맞는거 같기는 한데, 국민들은 실제 경제를 생각합니다.
막연히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이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100대 정책과제 같은 국민과 소통해 나가면서 하나씩 하나씩 정책도 발표하면서 나가는 정당이 되어야 합니다.
쉽지 않을 것입니다. 노사모를 기반한 개혁당과 민주당의 결합이 열린우리당이었습니다. 그러나 상향공천식도 안됐고, 당원의 성향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무리하게 화학적 결합을 시도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정당의 모습을 제안해 봅니다. 과거 정당구조 50% 와 인터넷 정당 50% 합쳐서 만드는 겁니다.
각각 방을 2개 짜리 집을 만드는 겁니다. 온돌에 TV가 있는 방하고, 침대에 컴퓨터가 있는 방 같이. 70~80년대 조직체와 2000년 개미시민은 서로 다릅니다. 2009년 촛불도 '그래 우리도 나가서 놀자' 했던 겁니다. 70년대 운동과 촛불은 차이가 많습니다.
같이 움직여 나가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네티즌들을 서울 같은 경우 5~6개 권역별로 나눠서 운영을 하고 굳이 실명을 공개하지 않아도 되는 재밌게 놀 수 있고 같이 갈 수 있는 정당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인터넷 학생정당도 만들어서 민주주의 훈련도 하고 해야 합니다. 피선거권이 있는 25~35세까지 젊은 사람들도 지역구에 출마하고 당선되도록 보다 넓은 유권자를 대변할 수 있는 구조를 제안해 봅니다.
독일 녹생당도 20대 의원들이 많습니다. 과거 열린우리당의 실패에서 처럼 몇몇의 대주주들의 편의를 위해 후퇴시키지 못하게 헌법보다 고치기 어렵게 당규를 만들어서 해보면 국민과 밀착된 정당이 탄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민주당이 왜 개혁을 하겠습니까, 굳이? 지금 구조는 지구당 위원장이 대의원을 선정하고 그 대의원이 다시 뽑는 구조입니다. 과거 개혁당을 할 때 10만명이면 이긴다고 했습니다. 전국에 200여개의 지구당이 있는데 10만이면 각 500명입니다. 500명 진성당원과 50명만 열성적으로 선거에 자원봉사하면 어떤 선거도 이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10만이 목표였는데 3만 5천에서 그쳤습니다. 민노당이 2만 3천이었는데 …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 시민운동 하시는 분들 중에 현실정치에 참여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이런 분들이 이런 구조의 민주당에 들어갈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검증된 사람들, 민변 같은 분들을 많이 확보 할수록 힘이 강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 시간에 하려다 보니 맥락이 안 맞습니다. 널리 이해해 주십시요.
감사합니다.
질의응답
Q. 국민참여신당에 대한 생각은?
A. 노코멘트
Q. 시민주권모임에서 발전하여 직접 정당활동을 하시겠다는 말인가? 탑다운 방식을 원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A. 개인적인 생각을 제안한 것이다. 저의 의견의 핵심은 현재 민주당은 개혁이 어렵고, 그래서 개혁을 추동할 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시민주권모임을 하는 사람중에서 탑다운 방식을 원하는 사람은 아직 본 적이 없다.
Q. 오전에 영화 '실종'에서 뵙고 저녁에 다시 뵈니, 기분이 새롭다. 영화배우로서 자기 이미지가 있는데, 이런 활동이 엄청난 손실이 있을텐데, 또 누군가를 위해서 데미지를 감수하고 시민운동을 할 생각이 있으신가?
A. '실종'하기 전에 예전에도 악인을 많이 했었다. '비상구가 없다'에서는 연쇄살인범, '초록물고기'에서는 조폭이었다. 2002년 대선 활동하면서 상업배우로서 치명적 타격이 예상보다 더 컸다. 강연은 처음이자 마지막일 듯 하다. 직업을 바꾸지 않는 한 할 여력이 없다.
Q. 노무현 영화를 만든다면 어떤 배역을 하고 싶은가? 노무현은 누가 하면 좋을까?
A. 악역에 대한 접근법을 아니까.. 족벌신문 쪽은 제가 하고(청중 박수), 노후보는 정말 어려워서 넓게 오디션을 해서 찾아봐야겠다.
Q. 영화인들이 조문에 소극적이었다는 말이 있다. 이유가 스크린 쿼터 축소에 대한 앙금때문인가?
A. 조문을 많이 하기는 했다. 스크린 쿼터 때문에 그런건 아니다. 70~80년대 문단에서 왜 그렇게 발표를 많이 했는가 하면 작가는 자기 혼자만의 결단이면 가능했기 때문이다. 연극은 10명, 영화는 더 많은 사람들이 돈에 관계되어 있어 개인활동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많이 가고 봉하도 가고 했다. 스크린 쿼터에 대한 앙금은 있을 것이다. 당시 이해찬 총리 주재로 정부안이 있었는데 그 안을 받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있다.
Q. 문성근에게 있어 이해찬이란?
A. 오랜 정책통이시고, 민주정부 10년을 모두 관계했던 '보물'이다. 앞으로 많은 기능이 있을 것이다.
Q. 검찰, 경찰, 정보기관을 놓은 것이 최대공적인데, 좌절시킨 것 또한 이 공적 때문이 아닌가?
A. 검찰이 언젠가 우리는 물라면 무는 사람들이다라고 했다. 3각 동맹에서 검찰은 하수인에 불과하다. 너무 순진한거 아니냐는 얘기도 있는데, 80년대 문목사가 북한에 갔다가 넘어올때 귀국 기자회견에서 어느 기자가 내려가면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되는거 아니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 때 대답이 '저는 그동안 악법에 깨지면서, 악법을 깨왔다. 악법에 두들겨 맞으면서 악법을 헤쳐나왔다'고 했다. 족벌신문이나 검찰에 대해 다른 어떠한 방법도 없었다. 당함으로써 국민들에게 보여드리는 것이었다. 놓아주었더니 과거로 다 돌아갔다. 그래서 '중립화'가 되어야겠다는 것을 알려드려야 한다. 순진했다는 비판을 받더다로 옳은 원칙이었다.
Q. 강의원고가 있으면 좋겠다.
A. 원고는 없고 메모만 있다. 메모는 별 의미가 없을거 같다.
Q. 아까 신문을 '경쟁자'로 인식해야 한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말씀해달라.
A. 집권을 추구하는 세력이 있다고 이해하면 될 거 같다. 언론이라는게 감시를 하는 원래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데 관중석을 내려와 운동장에서 직접 뛰고 있으니까... 정권을 놓고 경쟁하는 자세로 봐야한다는 뜻이다. 예전에 이병철 회장 자서전에 보면 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 이후에 언론을 가져야겠다 생각했다는 것이다. 또, 공화당의 민관식 의원이 있었는데 꼴 보기 싫어서 갈궜더니 선거에 떨어지더라 하고 쓴 부분도 기억이 난다. 뒤통수 때려도 가만 있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정권을 놓고 경쟁하고 비굴하게 타협하지 말고, 해봐야 소용없다.
Q. 돌 된 딸이 있다. 민주세력으로서 아이를 더 낳아야 하는가? 가치관이 언제부터 지금처럼 자리 잡았는가? 문목사 님을 원망하지는 않았나? 얘기를 듣고 더 낳을지 말지를 결정하겠다.
A. 목사아들 중에 문제아가 많다. 집안과 강단에서의 모습이 차이가 많기 때문이다. ‘아! 저 위선 … ’ 비뚤어지는거다. (청중 웃음) 76년 처음 (감옥에) 들어가셨을때 대학 4학년이었는데 … 다른 분들에게 많이 미안해 하셨다. 장준하 선생은 2남 1녀가 있었는데 아들 둘 모두 대학을 못갔다. 돈이 없어서. 딸만 이대를 다녔는데 그것도 김옥길 총장이 다니게 해 주어서 다닌 것이다. 장준하선생 돌아가시고 전세금 빼고 남은 게 없을 정도였다. 예전에 독립운동 하셨던 분들이 거의 대개 다 그랬다. 우리 집은 3남 1녀인데 대학도 다 가고 … 그래서 (문목사는) 죄송하게 생각했다. 제 경우 원망한 적이 없었다. 불편은 많았지만. 제 처가 무역회사 다녔는데 여권을 안줬다. 지금도 구체적으로 말을 못해서 그렇지 6공으로 돌아간 것 같다. 대통령께서 나로 말미암아 고통받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말한 것이 이런 것 같다. 이래도 되나 싶다. (잠시 침묵)
Q. 왜 조중동 탓만 하는가? 원론에만 강하고 각론에는 약하다. 종이신문 시장은 망하고 블로그, 포털 등 인터넷 신문에 대한 공부를 너무 안하는 거 같다.
A. 조중동 탓을 하려는 게 아니라 참여정부 5년 동안의 고통에 대해 말하려고 한 것이다. 10년 사이에 신문시장 구독율이 70%에서 40%로 떨어진 것에서 위기의식을 느끼고 방송으로 진출하려고 미디어법을 압박한 게 아닌가. 여러 좋은 방안에 대해 얘기하고 있고 기대하고 있다.
Q. 촛불, 미디어악법, 용산, 대운하 많은 이슈들이 있는데 여기 오신 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바란다.
A . (질문이 아니라서 답변 없음)
Q. 한겨레, 오마이, 경향 같은 진보언론도 신뢰가 안 간다. 좋은 언론이 필요한데 새로운 언론에 대한 생각과 대안은?
A. 한겨레에 시민들이 500억을 모아줬는데 지금 저 모양이다. 종이신문으로는 불가능하다. 인터넷 등 다른 언론을 강화해야. 오히려 이명박 정부 하에서 경향이나 한겨레가 문 닫지 않을까 걱정이다. 힘이 닿는한 돕는 것이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Q. 이명박 정부에서 유인촌 장관의 권위와 힘을 보니 문화부장관이 이리 힘이 큰지 몰랐다. 왜 정치를 안하는가?
A. 문화부가 힘이 큰게 아니라 사람에 따라 다른거 같다. 처음에 정치를 안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시작한 것이고, 문목사가 크게 시비거리가 없는데, 87년 분열에 있어 어쨌거나 비판을 받은 면이 있다. 물론 절차도 다 지키고 단식도 하고 양김 불러서 토론도 하고 대국민사과도 했지만 … 감히 비교도 안되지만 문목사의 아들로서 국민들께 '사죄'하는 의미도 있었다. 그런 내가 활동의 결과로 덕을 본다면 동기가 성립이 안되는 것이다. 많은 제안이 있었지만 다 사양했다. 또 내가 보여준 예가, 정치적인 발언과 활동을 하다가 복귀하면 이런 전통이 쌓이면 다른 사람들도 보다 더 편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정치를 하면 그 예까지 없애버리는 것이기 때문에도 그렇다. 그런데 아무도 안 믿더라(청중 웃음) 아무나 자유롭게 자기 의사를 밝힐 수 있는 사회로 빨리 갈 수 있으면 좋겠다.
박수 길게 이어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