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서평 - 진중권 (2013. 3. 9)

우렛소리 2013. 4. 14. 07:05

<어떻게 살 것인가> 서평 - 진중권 2013. 3. 9.
의왕달팽이 | 2013-03-09 13:57:31 | 조회 8937  |  추천 : 2 인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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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유시민이 묻다, 어떻게 사랑하고 죽을 것인가

[진중권의 책 읽는 인간]
정치판 10년에 인간성 마모
국가·사회에 묻힌 ‘나’를 찾아야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


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 지음, 아포리아
342쪽, 1만5000원


그 시절에 유일한 도덕은 ‘반공도덕’이었고, 유일한 윤리는 ‘국민윤리’였다.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야 했던 시절, 우리는 자신을 완전히 국가와 동일시하도록 강요 받았다. 국가권력의 생체공학이 그대로 개인의 도덕과 윤리로 강요되는 과정에서 사라진 것은 개인으로서 ‘나’ 자신의 정체성이다. 이 상황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도덕이나 윤리의 이름으로 가르쳐야 할 것은 사랑의 기술(ars amatoria)과 죽음의 기술(ars moriendi)이 아닐까. 사랑은 공동체에 새로운 생명을 입장시키는 절차이고, 죽음은 공동체에서 한 생명이 퇴장하는 절차다. 한마디로 사랑과 죽음은 도덕과 윤리가 우선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영역이다. 하지만 제도교육 12년을 통해 우리는 이에 대해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이 두 가지 물음은 결국 삶을 위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의 기술과 죽음의 기술은 결국 ‘삶의 기술’(ars vivendi)을 이루는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정치인 유시민으로 하여금 홀연히 정계를 떠나게 만든 것도 결국 그가 55세의 나이에 던진 이 물음이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정치인 노무현을 좋아했다”는 그는 “그가 너무 외로워 보이기에 도우려 나섰다가 정치에 뛰어들었다.” 정치에 뛰어든 지 10여 년 만에 이제 그는 이렇게 토로한다.

 “내게 정치는 내면을 채우는 일이 아니라 소모하는 일이었다. 이성과 감성, 둘 모두 끝없이 소모되는 가운데 나의 인간성이 마모되고 인격이 파괴되고 있음을 매일 절감했다.”

 저자는 ‘훌륭한’ 삶이 무엇인지 묻는다. 이는 전형적인 윤리학적 질문이다. 하지만 그에게 ‘무엇이 훌륭한 삶인지’ 판단하는 준거는 더 이상 조국이나 민족이나 시민사회가 아니다. 자연인으로 돌아온 그는 이제 ‘나’에게 훌륭한 삶이란 무엇인지 묻는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라면 이를 ‘자기의 배려’라 불렀을 것이다. 일종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轉回)라고 할까.

 저자는 칸트를 인용한다.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으로서 타당하도록 행위하라.” 하지만 정작 저자가 이 책에서 개진하는 윤리학은 실은 칸트의 것과는 대립되는 것이다. 개별자(‘네 의지의 준칙’)를 보편자(‘보편적 입법’)에 종속시킨다는 의미에서 칸트의 윤리학은 여전히 ‘근대적’이다. 반면 ‘나’를 중심에 놓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의 것은 ‘고대적’이다.

 고대의 윤리학은 개인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생의 목적은 ‘행복’에 있었다. 그에게 ‘선’(善)한 삶이란 곧 내 자신의 행복을 의미했다.

 하지만 근대의 윤리학은 ‘설사 네가 불행해지더라도 사회보편의 선을 추구하라’고 가르친다. 개별자는 보편자에 희생된다. 저자는 근대 윤리학이 지워버린 이 고대 윤리학의 가르침을 되살리려 한다.

 고대의 윤리학은 ‘실존의 미학’이었다. 저자가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실존주의 철학, 특히 알베르 카뮈가 던진 실존적 물음이다. “너는 왜 자살하지 않는가?”

 발터 벤야민은 어느 글에서 “파괴적 성격은 가치가 있다는 감정이 아니라, 자살이 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감정으로 살아간다”고 쓴 바 있다. 하지만 삶을 대하는 저자의 태도는 이보다는 적극적이다.

 그는 삶을 살만한 가치가 있게 만들라고 주문한다. 그가 제안하는 ‘자기의 테크놀로지’는 크게 네 가지다.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 앞의 세 가지 것이 ‘자아의 배려’라면, 마지막 요소는 ‘타인의 배려’와 관련된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되, 타인의 불행을 배려하라.’ 이는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소셜 리버럴’의 실존미학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최근 부쩍 죽음을 생각하는 일이 많아졌다고 한다. 그의 유물론적 윤리학은 ‘영생’을 부정한다. 삶에 의미를 주고, 사회에 정의를 유지하기 위해 굳이 ‘초월적’ 존재를 상정할 필요가 없다. 삶의 의미는 내재적이어야 한다. 현세에서 자신과 타인을 배려하며 행복하게 살았다면, 굳이 영혼이라는 이름의 귀신이 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이미 충만한 삶이다.

 정의 역시 초월적으로가 아니라 내재적으로 찾아져야 한다. 죽어 영혼이 된 상태에서만 누릴 수 있는 정의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행복하거나 불행한 것은 육체를 가지고 살아있는 존재다. 정의는 그 육체를 가진 존재들이 이 땅에서 서로 맺는 관계의 이름이어야 한다. 정의의 실현을 신에게 미루지 말라. 그것은 신의 은총이 아니라 인간의 과제다. 굳이 분류하자면 무신론적 실존주의라고 할까.

 어쩌면 무신론자야말로 진정한 윤리적 주체인지도 모른다. 윤리를 위해 굳이 신을 상정할 필요는 없다. 도덕과 정의의 근거로 신을 끌어들이는 것은 사실 윤리를 종교로 치환하는 것이다. 신이 명령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 스스로 옳다고 판단해서 하는 행위야말로 진정한 윤리적 실천이 아닐까.

 그리하여 요즘 나의 간절한 기도는 이것이다. “오, 주여, 내 죽음의 순간에 당신을 부정할 용기를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