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두 차례 글에서 나는 2007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유출하고 누설한 ‘범죄 용의자’가 누구인지, 그들이 무슨 목적으로 어떻게 그 ‘범죄’를 저질렀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2007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은 비밀로 봉인된 지 불과 6년 만에 ‘불법 공개’라는 불운을 당했다. 이런 사태를 야기한 ‘범죄 용의자’들을 반드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공개되어 버린 대화록을 다시 감출 방법은 없다. 대화록 공개는 원상회복이 불가능한 사건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대화록을 깊이 음미함으로써 남과 북의 공존공영과 평화적 통일로 가는 데 유용한 교훈을 배워야 한다. 한국전쟁이 멈춘 후 60년 동안 남북의 최고 권력자들은 여러 차례 직접 간접 대화를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밀사를 보내 김일성 주석과 대화함으로써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끌어냈다. 노태우 대통령은 남북 총리를 통해 김일성 주석과 간접 대화한 끝에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를 만들었다. 김일성 주석 사망으로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일정까지 합의한 바 있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은 평양에 가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직접 대화를 해 <6.15공동선언>과 <10.4공동선언>에 합의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참모들을 통해 남북정상회담을 타진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야당 정치인 시절 평양에 가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난 적이 있고 요즘은 통일부 실무자를 통해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과 간접 대화하는 중이다.
남북의 최고 권력자들 사이에 직접 간접 오고 간 대화의 전모가 완전하게 공개된 경우는 2007 남북정상회담 하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정말 희귀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이런 자료는 귀하게 대우해야 한다. 그 방법은 대화록을 모든 각도에서 최대한 깊게 음미하는 것이다. 2007 남북정상 대화록은 남북관계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선택 가능한 미래까지 모든 것을 보여준다. 남북 정치체제의 차이, 최고 권력자가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성격, 의사결정 과정의 특성, 상대방에 대한 인식, 이해관계의 대립과 접근 가능성에 이르기까지, 대화록은 정말 많은 것들을 있는 그대로 노출시켰다. 나는 이 연재를 통해 대화록이 노출한 남북관계의 중대 의제들을 하나씩 다루어나갈 예정이다. 오늘은 가장 뜨거운 이슈인 ‘NLL 문제’ 또는 ‘NLL 포기 논란’에 집중한다. 과연 노무현 대통령은 NLL을 포기했는가?
NLL(서해 북방한계선)이란 무엇인가?
우선 문제의 NLL이 어떤 성격을 가진 경계선인지 잠깐 짚어보기로 하자. 도대체 NLL이 무엇인가? 대통령이 마음대로 ‘포기’할 수 있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 아니다. 할 수 없다. NLL은 대통령이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북에 ‘상납’할 수 있는 그런 물건이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게 하려 한 것도 절대 아니다.
NLL은 원래 대한민국 군함과 민간 어선이 북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려고 유엔군 사령관이 설정한 해상 북방한계선이다. 한국전쟁 정전협정은 1953년 7월 27일 밤 발효되었다. 교전당사국이었던 북한과 미국, 중국은 양측 군대의 점령지역 경계선을 휴전선으로 삼는 데 합의했다. 교전당사국인 대한민국이 왜 빠졌는지는 독자들께서 재미삼아 한번 알아보시기 바란다. 정전협정 발효 시점의 경계선이 바로 155마일에 이르는 휴전선이다. 바다에는 휴전선이 없다. 육지에만 있다. 육상 군사분계선 남북으로 각각 2km씩, 폭 4km의 비무장지대(DMZ)도 정전협정에 따라 만들어졌다. 비무장지대는 원래 양측 모두 무기를 들여놓지 않아야 할 완충지대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남북 모두 그 안에 GP를 만들었고 중화기를 들여놓았다. 그러나 정전협정에 따른 것인 만큼 육상 군사분계선과 DMZ의 국제법적 지위가 확고하다.
그런데 NLL은 그렇지 않다. 정전협정을 맺은 교전당사국들은 해상 군사경계선에 대해서 아무 합의도 하지 않았다. 정전협정 이후에도 충돌이 계속 일어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것을 막으려고 마크 웨인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해상 북방한계선을 그었다. 그가 주한미군 사령관이기도 했음은 사실 말할 필요가 없겠다. 정전협정 발효 한 달 후인 1953년 8월 30일 설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엔군사령관은 북측에 북방한계선 설정사실을 통보해 주지 않았다. 통보해 봐야 다툼만 생길 것이기도 했고, 우리 해군과 민간 어선들이 그 선을 넘어 북으로 가지 못하게 하는 데 북의 동의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으로 추측한다. 당시 북은 해군력이 보잘 것 없어서 그런지 특별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NLL 설정 이후 20년 동안은 아무 문제없이 NLL남쪽 해역을 실효적으로 지배했다.
나는 클라크 장군의 결정이 매우 합리적이었다고 본다. 동해는 NLL을 긋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섬이 없기 때문에 육지의 휴전선을 동쪽으로 연장해 NLL을 그었다. 공평한 처사였다. 그러나 서해는 간단한 작업이 아니었다. 종전 당시 강화도에서 시작해서 연평도를 지나 백령도 등 ‘서해 5도’에 이르기까지 우리 군과 미군이 북측 해안에 인접한 섬들을 대부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섬들은 개성과 해주 등 북의 전략적 요충지에 근접해 있다. 교전 당사국들이 합의하지는 않았지만, 누구든 서해에 북방경계선을 만들려고 한다면 그 섬들과 북의 황해도 해안선 사이 어딘가에 그을 수밖에 없다. 북은 불만이었겠지만 객관적으로는 그게 공평한 처사였다고 본다.
그런데 해군력을 크게 증강한 북이 1973년 12월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서해 NLL에 대해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동해에서 한 것처럼 서해 군사경계선도 육상 군사분계선 서쪽 끝에서 해상으로 직선 연장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선박 접근로를 제외한 연평도와 서해 5도의 주변 해역은 모두 북의 것이 된다. 대한민국으로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가 없는 주장이었다. 그때부터 서해 NLL은 우리 해군과 어선이 북상하지 못하게 막는 북방한계선의 성격을 벗어나 북의 해군과 어선이 남하하지 못하게 지켜야 하는 해상 군사경계선이 되었다. 그리고 NLL을 무력화하려는 북과 지키려는 남 사이에 군사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NLL은 헌법에 따른 영토선이 아니다. 우리 헌법은 한반도와 부속도서 전체를 대한민국 영토로 규정한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법이 실제로 효력을 가지는 공간은 육상에서는 휴전선, 해상에서는 NLL 이남까지이다. 한반도에는 두 개의 국가가 있다. 남북은 오랜 세월 ‘공산괴뢰’, ‘미제괴뢰’라고 서로 욕을 퍼부었지만 결국은 상대방을 국가로 인정해 함께 유엔에 가입했다. 이것을 현실로 인정한다면 해상 NLL과 육상 군사분계선은 모두 대한민국 헌법의 효력을 보장하는 ‘실제적 영토선’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역시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NLL이 영토선이라는 주장은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남북관계는 특수한 관계여서 칼로 무 자르듯 옳고 그름을 나눌 수 없는 문제가 많은 게 사실이다.
북도 이런 현실을 인정했다. 처음에는 서해 군사경계선도 동해 NLL처럼 긋자면서 터무니없는 주장을 했지만 차차 후퇴해 1999년 이후 조금은 더 현실적인 주장을 했다. 모르는 독자들이 많겠지만 ‘민간인 통제선(민통선)’이라는 게 있다. 휴전선 근처에 살거나 군 복무를 해본 사람은 안다. 육지의 DMZ 남쪽에 있는 민통선을 통과하려면 군 당국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바다에도 그런 것이 있다. NLL보다 남쪽에 놓인 ‘합참 통제선’이다. NLL 주변은 군사충돌 위험이 상존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민간 어선이나 관광선이 합참통제선과 NLL 사이 해역을 항해하려면 군 당국의 허락과 통제를 받아야 한다.
2007 남북정상회담 당시 북이 주장한 해상 군사분계선은 우리의 합참통제선과 많이 겹치는 선이었다. 연평도와 서해 5도 등 섬에 인접한 해역은 기존 NLL을 인정하되, 섬과 섬 사이 빈 해역에는 NLL보다 더 남쪽에 해상경계선을 그은 것이다. 뒤에 살펴보겠지만, 우리의 NLL과 자기네 해상경계선 사이 해역을 공동어로구역으로 하자고 제안했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생각한 해상 군사경계선은 이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문헌 의원 등은 1973년 북이 주장한 서해 군사경계선과 우리 NLL 사이 해역을 노무현 대통령이 다 내준 것처럼 그림을 그려서 국민들에게 보여주었는데 이것은 공동어로구역 합의 내용을 이중으로 왜곡한 거짓말이다. 국회가 남북정상회담 관련 문서를 확인해 보면 내 말이 옳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어로구역과 NLL에 대한 두 정상의 합의
서해 공동어로구역 설정 방안은 우리 정부가 먼저 북에 제의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상회담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혹시 보지 못했다면 나중에라도 보라면서 ‘보고서’ 또는 ‘문건’ 세 개를 주었다. 새누리당과 일부 정신 나간 언론이 ‘국가기밀’을 넘겨주었다고 주장한 바로 그 문건들이다.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우리 정부는 전망이 밝은 남북경제협력사업의 항목과 실현방법, 기대효과를 담은 보고서를 만들었다. 내가 아는 바로는 김만복 원장이 김양건 통전부장에게 이 문건들을 미리 주었다. 정상회담에서 성과를 내려면 서로 무엇을 원하는지 미리 아는 게 좋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문건이 이미 북에 건네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직접 문건을 넘겨주었다. 대화록을 제대로 읽으면 누구나 그런 정황을 이해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10월 3일 오전 회의 모두 발언에서 평화정착, 경제협력 확대, 화해와 통일의 진전 등 3개 항으로 구성된 기본입장을 설명했다. 그런데 경제협력 확대와 관련하여 해주공단 개발 문제를 이야기하면서도 공동어로구역 문제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아마도 북이 받아들이기 어려우리라고 예단한 탓이었을 것이다. 이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었다. 미리 건네준 남북경협사업 관련 보고서에서 뽑아냈을 가능성도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서해안에서 벌어지는 군사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평화수역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가 이 정상회담에서 주도적으로 내놓은 유일한 구체적 제안이었다. 내용은 간단하다. 남측이 주장하는 북방한계선과 북측이 주장하는 해상 군사경계선 사이 해역을 평화수역으로 만들어 쌍방 해군력을 철수시키고 남북이 물고기를 함께 잡는 등 이익을 나누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공동어로구역을 만들면 우리가 실제 지배하고 있는 해역을 내놓고 북과 공동 관리하는 결과가 된다. 이걸 받았다가는 ‘NLL을 포기’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국민의 지지를 기대할 수도 없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걸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도 노무현 대통령은 ‘아주 관심이 많은 문제’라며 일단 긍정적으로 화답했다. 그리고 잠시 후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구상을 역제안 했다. 새누리당이 통탄하는 ‘NLL 발언’이 여기서 나왔다. 노무현 대통령은 “NLL은 국제법적 근거도 없고 논리적 근거도 분명치 않은 것인데 현실로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서 “북측 인민은 자존심이 걸렸고 남측에서는 이걸 영토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NLL문제는 옛날 기본합의의 연장선에서 협의해 가기로 하고 공동번영을 위한 커다란 바다이용 계획을 세워서 민감한 문제를 전향적으로 풀어가자”는 전향적인 방법을 제안했다.
‘옛날 기본합의’란 노태우 대통령 시절 남북이 체결했던 <남북기본합의서>를 의미한다. NLL을 존중하기로 이미 합의한 바 있는 만큼 건드리지 말고 서해 평화문제를 해결하자고 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상하게 생겨 가지고 무슨 괴물처럼 함부로 못 건드리는 물건이 되어 있는” NLL 문제를 풀기 위해, “서해 평화지대를 만들어 공동어로를 하고 한강하구도 공동개발하고 인천 해주 전체를 엮어서 공동경제구역을 만들어서 군대는 못 들어가게 하고 양측 경찰이 관리하도록 하는 그런 개념”을 제시했다.
오후 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NLL문제 해법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제안했다. “NLL문제는 안보군사 지도 위에 평화경제 지도를 크게 덮어 그리는 것으로 한다. 육지의 DMZ는 GP와 중화기를 철수해 생태공원으로 만들고 서해는 공동어로구역을 만든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화답했다. 오찬 시간에 군 수뇌부를 만난 이야기를 하면서 “개성을 확고히 한다면 해주를 내줄 수 있지만,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하는 첫 단계로 서해 북방 군사분계선 경계선을 쌍방이 다 포기하는 법률적 조처를 해서 군대는 다 철수하고 해경이 지키게 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는 것이 군부의 입장이라고 말했다. 오전에 ‘해주는 군사력이 개미 한 마리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며 강력하게 거부했는데, 오후에는 해주도 열어줄 수 있다고 대답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서해평화협력지대를 선포해 그것이 모든 경계선과 질서를 우선하는 것으로 한 번에 정리”하자며 NLL 문제 처리 방법을 다시 정리했다.
결국 남북 정상은 해주를 포함한 서해평화협력지대 설치에 합의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오전 회의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제안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양측 모두 수용할 수 있는 방안을 역제안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 역제안을 수용해 합의에 이르렀다. 이것은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상황에서 더 큰 공동의 이익을 보장하는 방안을 찾아냄으로써 합의를 만들어낸 지극히 정상적인 ‘밀고 당기기’ 협상이었다. 그런데 두 정상은 NLL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 세부사항까지 합의하지는 않았다. “서해 북방 군사분계선 경계선을 쌍방이 다 포기하는 법률적 조처”를 한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표현과 “서해평화협력지대가 모든 경계선과 질서를 우선하는 것으로 정리”한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표현은 같은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것 같기도 하다. <10.4공동선언>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남과 북은 해주지역과 주변해역을 포괄하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하고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경제특구건설과 해주항 활용, 민간선박의 해주직항로 통과, 한강하구 공동이용 등을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
결국 남북 정상은 그 회담에서 NLL문제 처리를 위한 세부합의를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10.4공동선언>이 명시한 대로 “해주지역과 주변해역을 포괄하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하고” 그 안에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을 설정”하며, 또 “경제특구건설과 해주항 활용, 민간선박의 해주직항로 통과, 한강하구 공동이용” 등이 이루어진다면 NLL은 사실상 의미를 잃게 된다. 남북은 군사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나던 가상의 해상분계선 대신 각자가 나름의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비무장 해역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NLL 그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NLL을 없애지 않으면서도 남북 양측 모두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구체적 방법은 무엇인가? 두 정상은 큰 틀의 합의를 하면서 남북총리회담과 장관급 회담 등 후속 실무회담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제를 주었다. 이것 역시 매우 정상적인 방식이었다고 나는 판단한다. 남북의 최고권력자들이 마주 앉아 공동어로구역을 어디에 만들고 이익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세부사항까지 토론하고 합의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두 정상은 이 합의가 남에서 만만치 않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임을 예상했다. 북은 아무 문제가 없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군부 핵심인사들이 합의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독재체제에는 그런 ‘장점(?)’이 있다. 유신체제 때는 우리도 그렇게 했다. 그러나 민주화 시대 대한민국은 그렇지 않다. 야당도 있고 언론도 있으며 시민단체도 있다. 국민의 이해와 지지를 받아야 <10.4공동선언>을 차질 없이 실행할 수 있다. 오후 회담이 끝날 무렵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쪽 사람들이 좋아할지, 반대는 없을지 물었다. 그는 걱정이 많아 보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다. “평화문제와 경제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는 포괄적 해결방식인데 얼마나 좋습니까. 자신 있습니다. 헌법문제 절대 아닙니다. 얼마든지 내가 맞서나갈 수 있습니다. 큰 비전이 없으면 작은 시련을 못 이겨내지만 큰 비전을 가지고 하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게 그렇게 되지 않았다. 큰 비전이 있었지만 시련을 이겨내지 못했다. 이명박 정권이 등장한 순간 <10.4공동선언>은 아무 효력도 없는 휴지조각처럼 버려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1년여 만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려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새누리당 정치인들과 국가정보원은 정상회담 대화록 유출하고 누설하고 공개해 버렸다.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마치 노무현 대통령이 NLL을 북에 가져다 바친 양 모함과 비방을 계속하고 있다. 국민 네 사람 가운데 적어도 하나 이상이 어처구니없게도 그것을 사실로 믿고 있다. 새누리당과 국정원의 주장을 커다랗게 뽑는 어떤 신문들과 방송들의 뉴스 제목만 보고 사는 사람들이다. 이분들은 참, 그런 신문과 방송에 나가지 않는 나로서는,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다. 독자들께서 이 글을 읽고 말씀을 좀 해주시면 좋겠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묻는다
2007년 11월 14일부터 사흘 동안 서울에서 남북총리회담이 열렸다. <10.4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합의서를 비롯해 여러 부속합의서를 체결했다. 개성공단 통행, 통신, 통관의 대폭적 개선과 해주경제특구 건설, 해주항 활용, 한강하구 공동이용, 민간선박 해주직항로 통과,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등 <10.4공동선언> 실현을 위한 세부 사업계획과 추진일정도 마련했다.
뒤이어 11월 27일 평양에서 남북 국방장관 회담을 열었다. 그러나 남북은 공동어로구역 획정 방식을 합의하지 못했다. 북은 우리의 북방한계선(NLL)과 자기네가 주장하는 해상군사경계선 사이 해역을 고집했고, 남은 NLL을 중심으로 남북 등거리 또는 등면적 해역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장수 당시 국방부장관이 이 회담에 나갈 때 우리 정부 안에 이견이 있었다. 국방부는 NLL을 확고히 지키기 위해 NLL 중심 남북 ‘등거리 공동어로구역’ 설정을 주장했다. 반면 해수부는 어민들을 위해 황금어장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남북이 같은 면적의 해역을 내놓는 ‘등면적 공동어로구역’을 선호했다. 그래서 연평도 근처 연안은 우리가 많이 내놓고 북의 장산곶 서쪽, 중국 어선의 불법조업이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해역은 북이 많이 내놓도록 공동어로구역 설정 방안을 만들었다. 이것은 각 부처의 중심과제가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견해 차이였다.
한편 대북업무를 직접 수행하는 통일부는 ‘등거리’이든 ‘등면적’이든 수월하게 북과 합의할 수 있는 방안을 원했다. 북 입장에서 보면 공동어로구역이 황해도 해안에 더욱 접근하는 등거리 방식보다는 등면적 방식이 덜 부담스러운 대안이었다. 결국 김장수 국방부장관은 등면적 공동어로구역 지도를 가지고 남북 국방장관회담에 나갔다. 그러나 이 회담에서 합의를 하지는 못했다. 군사적 신뢰가 걸린 문제여서 남북장성회담에서 더 논의하기로 했다. 내가 아는 바로는 그렇게 되었다. 만약 사실과 다르다면 지금 청와대 안보실장으로 있는 김장수 씨가 바로잡아 주기 바란다. 참여정부 국무위원이었던 분으로서 그 정도는 진실을 찾는 일에 봉사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묻는다. 대답해 줄 가능성은 전혀 없지만, 그래도 묻고 싶은 건 물어야 하겠다. 나는 대한민국 주권자로서 대통령에게 질문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질문이다. “서해 NLL을 중심으로 남과 북이 같은 면적의 해역을 내서 공동어로구역을 만들면 NLL을 ‘포기’하는 것인가?” “그렇게 하면 NLL을 북에 ‘상납’하는 것인가?” “박근혜 대통령은 대화록을 제대로 읽어 보기나 하셨는가?” 혹시 대화록을 읽어보아도 진실을 알 수 없다고 느꼈다면, “김장수 안보실장에게 진실을 물어 보지는 않으셨는가?”
2007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한 문서들이 있다. 관계장관회의를 한 기록이 국방부에 남아 있을 것이다. 정상회담 이후 남북 국방장관 회담을 준비하면서 만든 문서 역시 국방부에 남아 있을 것이다. 핵심 사항은 김장수 안보실장의 머리속에도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화록과 정상회담 전후의 회의기록을 비교해서 살펴본다면, 노무현 대통령이 NLL과 관련한 이념적 논란을 피하면서 서해의 평화와 남북의 경제적 공동번영을 이루기 위해 고민한 흔적을 그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은 달라도, 이념과 노선은 차이가 있어도, 그래도 전임 대통령이 했던 일이 아닌가. 공감하고 동의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그 고민과 전략이 앞으로 북을 상대해 나가는 데 참고가 될 수는 있지 않겠는가. 참고는 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박근혜 대통령에게 해가 될 리는 없지 않겠는가?
‘NLL을 피와 죽음으로 지켰다’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서로 죽이고 파괴하면서 전쟁을 벌였던 상대와 화해하고 그들을 평화와 공동번영의 길로 인도하기란 너무나 어렵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라는 정체불명의 구호를 내세우면서 갈등이 있을 때마다 북을 공개적으로 훈계하고 질책하는 것으로 신뢰를 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선거 때 DMZ를 생태평화공원으로 만들겠다는 공약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한 제안과 똑같다.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에서도 그 말을 해서 큰 박수를 받았다. 북과 합의하지 않고 무슨 재주로 중화기가 들어와 있는 DMZ에 공원을 만들 것인가? 그리고 북과 합의해서 그렇게 할 경우 그것이 서해 공동어로구역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그렇게 한다고 DMZ 한가운데 있는 군사분계선이 없어지는가? 노무현 대통령이 바다에서 하면 ‘NLL포기’이고 박근혜 대통령이 땅에서 하면 ‘구국의 결단’이 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대답을 듣지 못할 것임을 잘 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묻는 것은 내 권리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답할 수 없다면, 다른 누구라도 대신 대답해주기 바란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새누리당은 깊이 병들어 있다. 그 병은 의심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들은 예나 지금이나 노무현 대통령이 대한민국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더 좋아한 게 아닌가 의심한다. 자기네만 애국자라고 생각한다. 다른 의견, 다른 비전을 가진 사람은 ‘친북’, ‘종북’, ‘용공’이라고 의심한다. 이런 의심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정치적 경쟁자였던 조봉암 선생을 법살(法殺)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 선생을 일본에서 납치해 현해탄에 수장(水葬)하려고 했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노무현 대통령을 ‘이념적으로 살해’하려고 한다.
대화록을 보든, 후속 총리회담과 국방장관 회담을 보든, NLL이 헌법상의 영토선은 아니지만 남북이 두 국가로 나뉜 현실에서는 사실상의 영토선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노무현 대통령이 무겁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다만 NLL을 그저 지키기만 하는 게 아니라 군사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서해를 평화와 번영의 해역으로 만드는 것이 대통령의 임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래서 평양에 가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설득했던 것이다. 상식의 눈으로 대화록을 읽어 보면 모든 것이 명백하다. 이 목표가 잘못된 것인가.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만드는 것이 그 목표를 이루는 데 효과가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얼마든지 비판하라.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모함하고 비방하는 대신 사실과 진실을 기초로 삼아 비판하고 논쟁한다면, 그 누가 새누리당을 욕하겠는가.
문제는 노무현 대통령이 아니라 마음의 병이 든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통령이다. 그 병을 알아보지 못하고 함께 전염되어 가는 일부 ‘생각 없는 국민들’이다. 새누리당이 무얼 믿고 저렇게 하겠는가? 부동의 1위를 지키는 정당 지지율, 그것 하나 믿고 저러는 것이다. 그러니 집권당과 대통령의 행태를 비판적으로 보는 시민들은 전화 좀 받으시라고 부탁드린다. 짜증난다고 끊지 말고 여론조사 전화가 오면 쌍수 들고 환영하면서 새누리당 지지율을 떨어뜨려 주시기 바란다. 그래야 집권 새누리당이 정신은 못 차려도 최소한 행패를 덜 부릴 것이다.
새누리당만 문제인 건 아니다. 국가정보원도 괴물이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 시절 국정원에 대해 “대통령이 시키지만 않으면 저 혼자 못된 짓을 하지는 않는 데까지는 왔다”고 한 적이 있다. 그렇다 거기까지밖에 가지 못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한 원세훈 국정원장은 ‘못된 짓’뿐만 아니라 ‘못난 짓’까지 했다. 국민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국정원 직원들이 올린 댓글의 수준을 보라. 너무나 저열해서 멀쩡한 정신으로는 인용조차 할 수가 없다.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비밀등급을 제멋대로 바꿔 발췌본과 전문을 공개해 버린 남재준 국정원장의 행위도 ‘못된 짓’ 이전에 ‘못난 짓’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시킨 것인가? 만약 아니라면, 그렇게 ‘못난 짓’을 해서 대한민국 국가정보기관을 세계적 웃음거리로 만든 책임을 물어 해임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권력기관은 ‘문민통제’를 받아야 한다. 군대는 전쟁을 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다. 갈등과 분쟁, 충돌이 있어야 존재의 의미를 느끼는 조직이다. ‘문민통제’가 없으면 군대 조직은 외부의 적에 대한 적대감을 조장하고 충돌을 일으켜 전쟁의 위험을 높이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 정보기관 역시 다르지 않다. 문민통제가 없으면 정보의 힘을 바탕으로 자기의 권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마련이다. 남재준 원장이 이끄는 국정원은 사실상 ‘문민통제’에서 벗어나 있다. 그는 한나라당 정치인들 못지않은 ‘이념적 의심병’ 보유자인 것으로 보인다.
만약 노무현 대통령이 살아 있으면서 이 사태를 맞았다면 어떻게 할까? 그냥 한 번 상상해 본다. 그라면 ‘NLL 국정조사’를 하자는 새누리당의 요구에 기꺼이 응할 것이다. 증인 채택을 한다면 당당하게 나갈 것이다. 채택해 주지 않는다면 오히려 증인 채택을 요구할 것이다. 성남 국가기록원에 가서 정상회담 준비와 후속조처 관련 모든 중요문서를 다시 들여다보면서 있었던 사실 그대로 국민 앞에 증언할 준비를 할 것이다. 그 장면을 볼 수 없는 게 아쉽다.
국회 의석 절대 과반수를 가진 집권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통령은 지금 어리석은 충동과 사악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고인이 된 전임 대통령을 모함하는 일에 정신이 팔려 국정과 민생을 팽개치고 있다. 분단의 당사자인 북과는 한 마디 진솔한 대화도 하지 못하면서 중국 정부 고위책임자들에게 북핵 문제 해결에 힘써달라고 매달리고 있다. 자존심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능력도 다 잃어버린 것인가. 이명박 대통령이 냉동고에 넣어 얼려 버린 남북관계를 다시 녹여야 할 박근혜 대통령과 참모들이 어리석은 감정과 충동에 사로잡혀 민족 내부의 증오와 대결의식을 더욱 부추기고 있는 현실이 실로 참혹하게 느껴진다.
오래 전 우리를 깨우쳐 주었던 함석헌 선생의 말씀을 다시 새긴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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