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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교우님이 만든 라운지, 자랑스럽나?

우렛소리 2007. 8. 29. 04:55
이명박 교우님이 만든 라운지, 자랑스럽나?
[프레시안   2007-08-29 00:44:19]

 

 

'새끼 재벌'이 된 대학에 희망은 없다

[프레시안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교수]

"민족ㆍ평등ㆍ분배를 내세웠지만 '일자리 창출'에 실패한 386세대의 이념에 대해 냉소적인 '성난 젊은이'의 반란"

박해현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이 쓴 '포스트 386의 봉기'라는 칼럼의 일부다. 지난 25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이 칼럼에서 박 차장은 "<디워>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386세대 평론가 진중권을 향해 '안티 진중권' 운동을 주도하는 네티즌은 대부분 포스트 386세대"라고 적었다.

이어 박 차장은 <디워>를 비판하는 진중권과 '안티 진중권'을 각각 386세대와 포스트 386세대로 등치시킨 뒤, 이들의 대립을 "영화 '디워'의 용과 이무기의 싸움과 같다"라고 비유했다. 박 차장의 칼럼은 "누가 용이고, 누가 이무기가 될 것인지는 올해 12월 19일(대선 투표일) 갈린다. 개봉박두."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
<조선> "<디워> 논란은 20대의 386 향한 공격")

박 차장이 '포스트 386'이라고 지칭한 20대 젊은이들의 보수적 성향은 어제 오늘 나온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 2002년 대선에서도 조갑제 전 월간조선 사장은 "50대가 용돈과 등록금으로 20대를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갑제의 '30대 고립론') 용돈과 등록금을 통제해서 표심을 움직일 수 있다는 자신감은 20대 젊은이들의 정치적 성향이 진보보다 보수에 가깝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실제로 치열한 취업 경쟁에 내몰린 20대 젊은이들은 이전 세대에 비해 안정을 추구하는 성향이 짙다. (☞
"그래, 결론은 공무원이야") 그리고 사회적 약자의 처지에 대한 관심도 약한 편이다. (☞"민주화 20년, 다시 '박정희의 아이들'이 나타났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요즘 애들한테는 희망이 없다. 파시스트나 안 되면 다행이다"라며 혀를 차기도 한다. (☞
"구조조정은 해야죠…나는 빼고!")

하지만 이렇게 혀를 차서 바뀌는 것은 없다. 또 20대 젊은이들의 보수성만 탓할 뿐, 그 배경에 있는 치열한 취업난을 무시하는 것은 또 다른 위험을 안고 있다. 젊은이들에게 '미래에 대한 불안'만 안겨준 기성세대의 책임은 묻혀버리는 것이다. (☞
"'요즘 20대가 한심하다'는 386은 들어라")

한편 20대 젊은이들에게 '미래에 대한 불안'만 심어준 책임은 대학 역시 피해갈 수 없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대학 진학률이 80%를 넘어섰다. 20대 젊은이들 대부분이 대학 교육을 받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대학은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공간이기보다, 불안을 잉태하는 공간에 가깝다. 우선 평범한 가정의 자녀들이 감당하기 힘든 수준에 달한 등록금이 그렇다. (☞
'등록금 천만 원 시대', 갈등과 해법) 지나치게 높은 등록금은 빚에 찌든 젊은이들을 쏟아낸다. 빚을 갚기에 급급한 젊은이들이 사회의 불의에 맞서는 패기를 키우기는 힘든 일이다. (☞"그들의 젊은 패기를 시들게 할 건가")

또 민주화 이후 학사 운영의 자율권을 얻었으되, 적절한 견제는 이뤄지지 않고 있는 사학 재단의 행태가 그렇다. 재단의 전횡이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 것을 지켜보며, 대학 생활을 보낸 젊은이들에게 불의에 대한 저항의식이 싹트기는 어려운 일이다. (☞
'사학 민주화', 길을 잃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체제에 순치된 젊은이들은 기성세대가 형성한 학벌 체제를 허물기보다 오히려 강화하려는 양태를 보이기도 한다. (☞
'3불 정책', 그리고 '대학 훌리건'의 사회)

이런 학벌 체제는 서민 가계에서 감당하기 힘든 등록금이 부과되고 있음에도 변변한 저항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우리 학교가 학벌 서열 경쟁에서 앞서려면 보다 웅장한 건물이 필요하다"는 대학 당국의 주장에 대해 학생들이 제대로 대꾸하지 못 하는 것이다.

특히 지난해 고려대와 통합된 고려대 병설 보건대학 학생의 고려대 총학생회 투표권 인정 문제를 놓고 고려대 내에서 불거진 갈등은 이런 학벌 의식이 드러난 한 사례였다. (☞
고려대 '출교' 사태에서 우리의 미래를 엿보다) 당시 많은 고려대 학생들은 3년제인 고려대 병설 보건대학 학생들을 동료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보건대 학생들의 투표권 인정을 요구한 일부 고려대 학생들이 보직 교수들이 충돌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교수들과 충돌한 학생들은 학적 자체가 말소되는 '출교' 처분을 받았다. 이들 학생들의 학적은 아직 회복되지 않고 있다. 하필 당시 출교된 학생들 대부분은 2년 전, 이건희 삼성 회장에게 명예 철학 박사가 수여된 것에 항의했던 이들이었다.

재벌 회장에게 명예 철학 박사를 수여하는 대학, 여기에 항의한 학생들에 대한 출교 조치는 한국의 대학이 선 자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풍경이다. 대학의 저항 문화가 살아 있었던 시절에는 상상하기 힘든 풍경이기도 하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한국에서 자란 이들보다 한국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는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박노자 교수가 <창작과 비평> 최근호에 이런 대학 풍경에 대한 글을 썼다. "한국 대학사회의 슬픈 단상들"라는 제목의 글이다.

박 교수는 대학의 저항 문화가 살아 있던 1991년, 고려대에서 경험한 감동으로 글을 시작했다. 소비문화에 젖은 중산층의 삶을 동경하기보다, 소외된 노동자와 평생을 함께하겠다던 선배, 동료들의 모습에서 받은 감동이다.

하지만 이처럼 박 교수에게 깊은 감동을 남겼던 고려대 캠퍼스의 모습은 불과 15년 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새끼 재벌'이 되려는 대학당국의 몸부림과 이에 동조하는 학생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런 사정은 고려대뿐 아니라 서울대, 연세대 등 다른 대학들도 마찬가지다.

낯선 땅에서 찾아온 이방인에게 깊은 감동을 남겼던 한국 대학의 저항 문화는 죽어버린 것일까. 불의와 기득권에 항거하는 젊은 지성은 이제 어디서도 찾을 수 없게 된 것일까.

박 교수에 따르면, 꼭 그런 것은 아니다. 학벌 체제의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의 사정은 아직 답답하다. 그러나 이런 기득권 체제에서 배제된 대학들에서는 새로운 저항의 기풍이 싹트고 있다는 게 박 교수의 관찰이다. 학생들의 반대로 정몽준 의원에게 명예 철학 박사를 주지 못 했던 전남대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다음은 <창작과 비평> 최근호에 실린 박 교수의 글이다. <편집자>


 

내가 사랑한 한국의 모교…"평생 노동자와 부대끼겠다"던 선배

나는 평소 학벌에 관심이 없다. 러시아에서 '우수한 대학'으로 꼽히는 레닌그라드(현 쌍뜨뻬쩨르부르그)국립대학과 모스끄바국립대학을 다녔지만 졸업 이후 동창회에 간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만큼 나의 러시아 모교들에 향수라고는 느껴본 적 없지만, 1991년에 3개월간 언어실습 일환으로 있었던 고려대에 대해서는 퍽 다르다.

당시 감수성이 풍부한 어린 3학년생으로서 한국에 처음 가봐서 그랬던 것일까? 체류기간은 채 한 학기도 안됐지만 그때 생겨난 추억은 소련/러시아에서 학사·석사·박사까지 했던 전체 기간보다 더 많았다.

교실에서의 신라사 강의와 향가나 시조 관련 수업부터 안암골 뒷골목에서의 막걸리 폭음까지, 지하 '운동권' 모임에서의 견문부터 운동장에서 뛰어놀던 일까지, 지적 도전, '대듦' 그 자체로 느껴졌던 고려대는 어린 나에게 너무나 '얌전하고' 제도권적인 본교 레닌그라드대학보다 매력적이었다.

거의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기분으로 귀국 비행기를 탔을 때 "평생 가난한 노동자와 부대끼면서 살고 싶다"던 한 여자 선배의 얼굴이 계속 눈에 선했다.

말년의 소련에서는 미국에 가서 자기 주택을 소유할 정도의 튼튼한 중산층이 되겠다는 선배들은 무수히 만날 수 있어도 가난을 감수하겠다는 인뗄리겐찌아는 빛바랜 옛날 책에서만 찾을 수 있었기에 그 고려대 선배의 담담한 '진로구상 고백'은 나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나를 만든 것은 1991년 고려대에서의 경험…"대듦이 바로 생명"

세상에는 돈과 출세를 마다할 수 있는 사람이 실재한다는 것을 난생처음으로 발견한 것이다. 함석헌(咸錫憲) 선생께서 "대듦이 바로 생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16년 전 고려대에서 '생명' 그 자체를 봤다. 목마르고, 늘 뭔가 찾고 있고, 때로는 절망과 좌절을 하고, 때로는 배제와 적대의 극단까지 가는, 자연이 낳은 그대로의 생명이었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나'는 어찌 보면 그때 그 경험이 '만들었다'고까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991년 말 서울을 떠난 후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고려대에 들렀다. 그러나 대개는 신세졌던 은사들에게 인사드리기 위한 짧은 방문이었기에 '나의 학교'와 본격적으로 '재회'한 것이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1990년대 말 3년간 서울 근처의 한 사립대에서 강의하던 시절에도 쎄미나 참석 등의 목적으로 몇번이나 고려대에 갔지만, 학교를 제대로 둘러볼 여유를 갖지 못했다.



"현직 국회의원의 20% 배출한 최고 명문대학"이라는 홍보책자

2000년 오슬로대에서 교직을 얻어 노르웨이로 옮긴 뒤에는 그러한 기회마저도 거의 끊겼다. 2005년쯤인가 고려대 당국에서 우편으로 보낸 두툼한 학교 홍보자료를 받았는데, 끔찍하게도 홍보책자 첫 페이지에는 영문으로 "고려대학교는 현직 국회의원들의 20%를 배출한 대한민국 최고 명문대학 중 하나"라고 적혀 있었다.

이 문구를 보는 순간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런 방식으로 학교를 홍보하는 분들은 특정 몇개 '명문'대학의 전국적 패권주의가 세계적 자랑거리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이 문구를 보는 외국대학의 상대자들이 당장 고려대의 '힘'을 우러러볼 것으로 기대하는 것인가?

학교간 교류 문제다 보니 그 자료를 상부에 제출해야 했지만, 나의 '한국 모교'가 이러한 방식으로 홍보물을 만들었다는 것이 부끄러워서 제출을 계속 미루기까지 했다.

이 '홍보자료 사건'(?) 이후로는 내 사랑하는 안암골에서 모종의 탐탁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는데, 그만큼이나 추억어린 고려대 교정에 다시 가서 시간 여유를 가지고 모든 문제들을 제대로 관찰해볼 기회를 계속 기다리게 됐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2006년 늦은 봄에, 그해 여름 고려대에서 개최될 대규모 국제한국학대회에 토론자로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요청을 받자마자 "네, 물론 가겠습니다"라고 답신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인간적·학술적 고향과도 같은 '나의 고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직접 볼 기회가 드디어 온 것이었다.



'고급 커피숍과 늘어난 주차장'이 자랑인가

2006년의 무더운 여름 마침내 나는 꿈에도 그리던 안암골에 다시 갔다. 며칠에 걸쳐 아침부터 저녁까지 진행되는 학술행사다 보니 여유있게 캠퍼스를 돌아볼 시간이 있었다.

그전에도 옛날에 뛰어놀곤 했던 운동장이 없어진 것을 보긴 했는데, 그 대신 생긴 광장과 지하매장 시설을 그때 처음으로 자세히 구경했다. '중앙지하광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정문 바로 뒤의 지하시설을 둘러봤을 때는 만감이 엇갈렸다. 고급커피를 마실 수 있는 중고급 커피숍이 들어온 것은 커피 애호가로서 기쁜 일이었다.

그런데 만만치 않은 가격의 커피를 주머니 사정상 마시지 못할 학생들은 그 대신에 백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마시면서 얼마나 소외감을 느낄까?

지하주차장에는 자동차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세계의 많은 대학들과 마찬가지로 오슬로대 같으면 운동을 좀 하려는 요량부터 대기오염과 지구온난화에 대한 염려까지 중첩돼, 학생이든 교수든 대학인들 사이에서 자동차로 출퇴근하는 것은 불명예로 인식된다.

학교 당국에서 꽤나 좁은 주차장을 늘리려는 움직임이 별로 없으며, 자동차를 타고 오다 동료들과 마주치면 "아이들을 멀리 있는 유치원에 데려다주느라 어쩔 수 없이 탔다"는 변명을 하느라 바쁘다.

그런데 고려대에서는 오히려 '주차장을 늘렸다'는 것을 자축하는 분위기인 듯했다. '글로벌 대학'을 지향한다는 학교가 환경처럼 핵심적인 세계적 문제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비(非)세계적'인가? 지하광장을 구경할 때부터 느낌이 다소 이상했는데, 그다음에 구경하게 될 일들에 비해서는 약과에 불과했다.



650억원 들인 '삼성관'…3천명의 시간강사는 어쩌고?

학회의 장소는 '100주년기념 삼성관'으로 명기되어 있었다. 삼성관? 1991년이라면 상상하기도 어려운 이름의 이 건물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나는 알 리가 없었다.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중앙광장과 멀지도 않은 그 삼성관 문으로 들어서자 외국대학에서도 보기 어려운 신축 건물의 화려함에 새삼 놀랐다.

대회 장소에 들어가 알고 지내던 고려대 교수에게 물어보니 공사비가 650억원에 달했다는 답을 들었다. 650억원! 상상을 압도하는 액수였다.

가만히 계산 좀 해보자. 선배들에게 들은 대로 고려대에서 전임강사의 평균 연봉이 5천만원 정도라면 전임강사 이상 교원의 평균 재직기간을 25년으로 치고 승진시 연봉 증액까지 감안해도, 이 650억원이면 약 40명의 소장학자들에게 시간강사로서의 고생을 면하게 해주고 정규직으로서 학문적·교육적 인생을 보장할 수 있지 않겠는가?

고려대는 어떤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전국 사립대에서 전체 교양강의의 47.1%, 전공강의의 30.5%를 시간강사들이 담당하는 것으로 안다.

한시간에 3만원 정도 받는 시간강사가 학술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과연 일주일에 20시간쯤 강의하는 시간강사가 '글로벌' 수준의 강의를 충실히 준비할 수 있겠는가?

선배들 이야기로는 고려대에서 약 3천명이 시간강의를 하고 있다던데, 이 건물의 건축비로 그중 100분의 1이라도 구제할 수 있지 않겠는가?



글로벌 대학의 우울한 초상…'홍보'와 '유대', '자산 증식'의 결합

한동안 계산에 몰두해 있다가 갑자기 그날 새롭게 들은 단어가 생각났다. 아, 이 건물은 단순히 '100주년기념관'이 아닌 '삼성관'이지 않은가?

아까 그 교수에게 다시 물어보니 삼성이 이 건물을 짓는 데 약 400억을 지원했다고 한다. 그의 의견으로는 삼성이 그렇게 함으로써 '기업홍보' 효과를 보는 동시에, 나중에 사회에 진출해 성공할 가능성이 많은 고려대 졸업생들과 일찌감치 유대관계를 만들려 했던 것 같다는 것이다.

그제야 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물론 40명의 소장학자들을 구제하는 것보다 최첨단 건물을 짓는 것이 광고효과상 훨씬 나은 일일 수 있겠다.

학교재단으로서도 자산증식 효과가 있으니 양쪽에 안성맞춤인 셈이다. 참, 우연치 않게 시공을 한 회사도 역시 삼성이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궁금증이 남았다. 명색이 교육기관이라면 우선적으로 전임교원 확보, 학생들에 대한 장학금 지급, 환경미화원 같은 저임금 직원들의 임금인상부터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것 역시 나의 '불편한 발견들'의 시작에 불과했다.

학회에서 발표를 듣다가 전자우편을 확인할 수 있는 공용 컴퓨터를 찾으려고 삼성관을 벗어나 인접 건물들을 누비기 시작했다.

삼성관 바로 옆에 'LG-포스코 경영관'이 있었다. '삼성관'만큼이나 '포스코관'이란 이름도 이질적으로 들렸지만 그렇게까지 낯설진 않았다. 그전에 이화여대에서도 이미 그쪽의 '포스코관'에서 학회를 한 적이 있지 않았던가? 참, 이대에서도 '이화삼성교육문화관'인가를 본 적이 있다.



"이 라운지는 이명박 교우님의 고귀한 뜻과 정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연세대에서도 생활관을 '삼성관'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학교마다 동일한 이름의 건물들… 글쎄, 내가 태어난 소련만 해도 도시마다 '레닌거리'가 있긴 했다.

자칭 '민주화된 사회'에서 일당독재국가처럼 똑같은 건물 이름이 도처에서 보이니 쓴웃음이 나올 일이다. 그런데 '포스코관'은 그렇다 치고, 그 안에 있는 커다란 방의 이름이야말로 충격적이었다.

'이명박 라운지'라는 곳에는 "이 라운지는 이명박 교우님의 고귀한 뜻과 정성으로 이루어졌습니다"라는 팻말까지 걸려 있었다. 이 팻말을 보자마자 한동안 그냥 멍하게 서 있기만 했다.

미국의 많은 대학처럼 기업의 기부를 유치하여 건물에 기업 이름을 붙이는 것이 불가피하다 해도, 현역 정치인의 이름을 딴 대학 라운지라니?

정치인 이명박 교우를 이런저런 이유로 혐오하는 교직원이나 학생도 있을 텐데, 이들에게 '이명박 라운지'를 보면서 사는 생활을 강요하는 것은 합당한 일인가?

여러 정당의 지지자들이 섞일 수밖에 없는 대학공간에 특정 정당의 거물 정치인 이름을 딴 라운지만 있다면 이는 정치적 편향이고 다른 정당 지지자들에 대한 인권 침해가 아닌가?

물론 기업인 '교우님'들이 가장 선호할 듯한 정치인 '교우님'의 이름을 따 라운지를 만든 학교의 '고귀한 뜻'이 무엇인지는 당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의 '성향'을 믿어주고 계속 '삼성관'과 '포스코관' 들을 지어달라는 이야기 말고 다른 해석이 가능하겠는가?



"'X파일', '무노조 경영'을 정상으로 가르칠 건가?"

내가 1991년에 난생처음으로 '대듦의 미(美)'를 체험한 곳에서는 이제 얌전하고 점잖게 '이명박 라운지'나 '이학수 강의실' 등이 별다른 가시적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돈만 내면 학교에 대한 기부와 건물·강의실 명명을 통해 자신의 기업을 학생과 방문자 들에게 홍보해도 하등의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인가?

신문으로 치면, 아무리 광고소득으로 먹고산다 해도 자존심이 있는 언론이라면 각종 스캔들로 구설수에 오른 기업이나 개인의 광고를 싣기 전에 심사숙고를 거듭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깨끗한' 이미지를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는 학교는, 훨씬 더 까다로운 여과장치를 작동시켜 '문제'가 있는 회사나 인물 들을 걸러내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는가?

예컨대 비록 불법 증거물로서 수사에 이용되지 않았지만 그 내용이 어느정도 진실을 담고 있다고 추측되는 'X파일'에서 회뢰(賄賂)행위의 주체로 드러난 이학수-법정의 판단 전에는 그를 범인으로 볼 수 없다손 치더라도-의 이름을 적어도 수많은 의혹들에 대한 충분한 석명(釋明)이 있기 전에 학교 강의실에 붙여 그를 마치 학생들에게 '모범'으로 '추천'하듯 하는 것은 비교육적·반교육적 행위가 아닌가?

졸업 후에 노사관계의 현장으로 진입할 학생들에게 '삼성관' 같은 건물 이름을 통해 삼성의 '무노조경영'을 마치 정상적인 일로 여기도록 해도 학교로서 문제없는 것인가?

그런데 고려대 당국자들에게 이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이렇다 할 비판적 성찰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돈을 준 사람이나 기관이 사회에서 어떻게 평가되든지 '돈을 받는다'는 행위 그 자체를 성공 내지 명예로 여기는 듯한 눈치였다. '돈에서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Pecunia non olet)는 속담도 있지 않던가.



실종된 '대듦의 정신'…"反기업적 학교이미지를 만들면 되겠느냐"

학교 당국자나 교수들에게서는 '대듦의 정신'을 발견하기 어려웠지만, 80년대의 비판과 투쟁의 시대적 유산이 완전히 '청산'된 것은 아니었다.

2005년 5월 2일, 삼성의 이건희 회장에게 고려대가 명예 철학박사학위를 수여하는 식장에서 일부 학생들이 "노동탄압을 자행하는 기업인에게 명예학위를 수여하는 것을 반대한다"면서 격렬하게 시위를 벌였다.

이건희가 경영자로서라면 모를까 '철학자'로 알려진 일이 없음에도, 그리고 삼성에 의한 노동운동 탄압(노동자 감시, 노조 결성시도에 대한 폭압적 대응 등)의 진실을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했음에도, '정당한 대듦'이라고 봐야 할 이 학생들의 행위는 사회적으로 거의 '폭풍'을 불러왔다.

보수신문들이 아우성친 것은 물론, 비교적 진보적인 <경향신문>까지도 실제 물리적 충돌이 없었던 시위사태를 가리켜 "고려대에서 일부 학생들이 보인 행태처럼 물리력을 동원해 자기 주장을 관철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학생들을 나무랐고, 학교는 삼성 앞으로 길디긴 사과문을 보냈으며, 보직교수 전원은 사표를 제출했을 뿐 아니라, "반기업적 학교이미지를 만들면 되겠느냐"는 일부 학생들에게 총학생회가 탄핵을 받을 뻔했다.



2006년 고려대 출교자, 7명 중 6명이 이건희를 비판한 학생들

"이건희가 노동운동을 탄압한다"는 진실의 한마디를 했다가 시위학생들은 너무나 아프게 뒤통수를 맞았다. 이들은 '이건희사태' 당시에는 시민사회의 항의 등으로 처벌을 면했지만 약 1년 뒤 무자비한 징계를 당했다.

2006년 4월초 7명의 고려대 학생이 고려대와 통폐합된 병설 보건대 학생들에 대한 차별문제로 보직교수들과 장시간 대치하며 그들의 귀가를 물리적으로 막은 집단행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학교로부터 '출교(黜校)'처분을 받았다.

학적부 기록까지 다 말소됨으로써 입학 자체가 무효화돼 재입학 가능성마저 봉쇄되는 대학가의 사형(死刑)인 셈이다.

물론 보직교수들의 귀로를 차단한 학생들의 행동이 과격했다는 것은 출교조치 철회를 요구하는 이들까지도 인정한다.

그런데 출교당한 7명 중 6명이 바로 이건희 명예박사학위 수여 반대시위에 가담한 경력자였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였을까?

이들은 보직교수와의 대치에 단순가담만 했음에도, 전혀 징계를 당하지 않은 '이건희 반대시위 무경력자' 동료들과 달리 매우 가중된 처벌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즉 보직교수의 귀가를 막은 이들 중 1년 전 "이건희 반대"를 외친 이들만 처벌된 셈이라고 한다. 참, 복수란 조폭영화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학교도 지나쳤지만, 학생도 과격했다. 왜 삼성을 반대하나"…'삼성의 적'은 '非국민'

2006년 여름, 나는 출교자들이 무기한 농성하고 있던 천막을 지지방문한 적이 있었다. 나의 인상은 두가지였다. 하나는 출교자들이 '교내의 사형수' 같지 않게 활기차고 당당했다는 것이다.

국가도 움직일 수 있는 초강력 재벌 삼성의 '적'이 된 그들은 놀랄 만큼 부담이 없어 보였다. '삼성의 적'이라면 이 나라에서 '비(非)국민'이 되고 만다는 법칙을 아직 충분히 체득하지 못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진리가 자신들의 편에 있다는 것을 알고 사필귀정(事必歸正)을 정석처럼 믿었던 것일까?

다른 하나는, 그들의 재기발랄한 모습과 정반대로 그들의 지지기반은 안타깝게도 좁아 보였다.

민교협, 민주노동당, 일부 진보 지식인들과 극소수의 고려대 교원들이 그들을 공개적으로 옹호하는 데 나섰지만, 고려대 재학생(약 3만 6000명) 중 그들을 위해 징계 반대운동에 서명해준 이들은 당시로서는 약 10분의 1(3500명 정도)에도 미치지 못했다.

동료를 박해에서 보호해야 할 도의적 책임을 갖고 있는 이들은 이 일에 놀랍도록 무관심했다. 물론 내가 지난 여름에 만난 고대생 중 일부가 징계에 적극적으로 반대했지만 대다수는 이 일에 개입하기를 꺼렸다.

"학교가 지나치게 가혹한 처벌을 내린 감도 있지만 학생들도 너무 과격했다. 우리나라를 먹여살리는 삼성을 애당초 왜 이렇게 반대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삼성의 투자 받을만한 학교'라는 자부심?

물가상승률을 압도하는 등록금 인상에 불만을 품은 학생들은 꽤나 볼 수 있었지만 '삼성관'과 '포스코관', '이학수 강의실'과 '이명박 라운지'는 상당수에게 당연하거나 자랑스럽기까지 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기부를 많이 받을 만큼 우리 학교가 명성과 힘이 있는 것이 아닌가?" 고려대라는 이름의 '힘'과 삼성이라는 이름의 '힘'이 만나 명예-광고효과와 돈을 서로 교환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별다른 의문을 일으키지 않고 있었다.

우리 사회의 현실적인 힘이라면, 그들 중 많은 이들의 의식 속에서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듯했다.

이 '힘'의 도덕적 정당성이나 사회·정치적 함의에 대한 고민의 싹들이 '대기업의 투자를 받을 만한 명문대 학생의 신분'에 대한 자긍심의 무게에 깔려 제대로 자라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과연 나만의 불행한 느낌이었던가?

1991년 나와 첫 만남이 이루어졌을 때만 해도 '대듦'의 상징처럼 비치던 이 학교가 어떻게 해서 부당한 출교조치에 학생들의 힘찬 총궐기로 응수하지 못할 만큼 '얌전한' 곳이 됐을까?

이런 눈꼴 사나운 '환골탈태'는 비단 특정 학교의 일이 아니라 2000년대 초반 한국 대학사회가 겪는 변화의 '대세'를 반영하고 있는 것인가?

후자의 질문부터 살펴보자면, 고려대의 '파격 변신'은 대표적이면서도 나름대로 특이하다. 우선 살펴볼 지점 하나는, 학벌사회라고 할 한국에서 고려대가 서울대에 버금가고 연세대와 맞먹을 정도의 '학벌자산', 즉 '명문대'로서의 위신과 동문집단의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학벌자산은 재벌들과의 유착관계 성립을 더욱 수월케 하고, 재벌들의 광고판으로서 교정(校庭)의 가치를 크게 높인다.

대표적인 점은, 출발점부터 교육관료들의 감독·지휘를 받으면서도 공공재원에 거의 접근하지 못해 시장에 내몰려 있던 거의 모든 한국 사립대학과 마찬가지로, 고려대도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교육정책에 보조를 맞추어가면서 아예 시장논리에 전면적으로 포섭돼 삼성이나 LG와 맞물릴 만한 교육계의 '재벌'로 새롭게 부상한 것이다.



통제 없이 팽창한 사학 재단…'학벌주의'와 부동산 폭등에 힘입어

일부 학계 아부쟁이들이 '한강의 기적'이라고 일컫는 박정희·전두환 시절 수출산업 초고속 성장의 비결은 특정 재벌 중심의 일부 부문에 모든 가용자원을 집중하여 산업을 육성한 것이었다.

수출산업이야 도약에 도약을 거듭했지만, 나라살림의 나머지 부분들에 대해서 군사정부는 '간섭, 규율화 그리고 최소한의 지원' 정책을 채택했다.

예컨대 초고속 성장의 기적을 이룬 '수출전사'들은 학교에서의 멸공이데올로기 주입과 교련, 군복무, 예비군훈련, 반공드라마, '건전가요' 등을 통해 신심(身心)으로 국가의 통제와 간섭을 받았지만, 그들에 대한 복지는 이미 국가가 신경쓸 일이 아니었다.

교육 분야도 마찬가지였다. 한편으로는 이승만 때 거의 관청의 간섭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급팽창해온 사립대학들은 최초의 '사립학교법'(1963)에 의해 교육부의 전면적 감독 아래에 놓이게 되었고, '대학학생정원령'(1965)에 의해 학생 정원을 스스로 정할 권리를 잃었으며, 국가 주도의 '대학입학 예비고사' 도입(1969)으로 입학전형의 주도권도 국가에 넘겨주어야 했다.

1970년대 후반의 병영국가는 아예 대학교수에 대한 인사감독권까지 '대학교수 재임용심사' 제도(1976)로 확보해 교수사회 통제용으로 적극 이용했다.

반면 사립대학에 대한 국가예산 지원은 매우 미약했으며 간접적 지원은 주로 교직원들에 대한 연금 지원(1975) 및 보험 지원(1977)과 대학법인에 대한 세제 혜택에 국한됐다. 수출산업 육성에 사활을 건 독재국가는 소수 국공립대학 이외의 고등교육 부문을 사실상 민간 교육업자들에게 떠넘기고 말았다.

국가가 그들의 학사행정이나 교수 인사정책에는 철저히 관여했어도 자산운영이나 회계에 대한 감독은 최소한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았기에, 1970년대 후반 엄청난 권위와 영향력 그리고 주로 부동산 형태의 상당한 자산을 보유한 '교육재벌'들이 출현했다.

특히 사회 전체의 학벌주의 패턴들이 공고화되고 지가(地價)가 계속 솟구치던 상황에서는, 상당한 부지를 갖고 있던 '명문' 고려대나 연세대 등은 매우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1990년대 사학 운영의 전권을 쥔 재단, 신자유주의 확산의 첨병

'대듦의 시대'인 1980년대에 그들은 학원민주화 요구에 시달려야 했지만 1987~88년의 형식적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국가에 대해 재벌들이 점차 주도권을 확보하게 된 새로운 상황은 이들에게 황금 같은 기회였다.

1989년 사립대들의 주 수입원인 학생등록금이 자율화됐으며, 1990년 사립학교법 제15차 개정이 이루어져 학교법인은 인사결정권과 예산결산권 그리고 경영권을 공고히 장악하게 됐다.

일부 사립대학에서 총장직선제가 도입됐지만 총장 임명 및 해임에 대한 최종적 결정권을 여전히 법인이 갖고 있는 탓에 제도적 발언권이 거의 없는 학생들은 물론 교수사회까지도 법인의 영향력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

이처럼 철저하게 비민주적 형태로 학교업자들은 1990년대에 하나의 사회적 '세력'을 이루어 1990년대 후반 이후 신자유주의적 사회재편의 주역 중 하나로 나서게 됐다.

1997년 말 외환위기 그리고 김대중정부의 등장과 함께 본격적인 '신자유주의화' 단계에 들어선 한국 고등교육의 상황은 어땠는가?

전체 대학생 중 77%가 사립대학에 다니는 등 공공부문에 비해 시장부문이 여전히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으며, 고등교육의 공공재원 부담률은 16%에 불과해(OECD의 평균은 80%, 미국은 48%이다) 학생 등록금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사립대 중심의 박정희시대 고등교육모델이 그대로 계승됐다.



강남 출신이 장악한 서울대·고려대·연세대

각료 중에서 고려대 출신(12.5%)과 연세대 출신(10%)을 합하면 서울대와 육사를 제외한 다른 모든 대학 출신(21.3%)보다 더 많았던 '국민의 정부'의 인사정책이 상징하듯이, 국가가 주도하는 학벌주의의 패턴이 여전했으며 고려대나 연세대 같은 '명문대' 입학을 둘러싼 경쟁은 치열해지기만 했다.

사교육비 총액이 1994년 5조 8213억원에서 1998년 12조 8866억원까지 늘어나는 등 이 경쟁은 사실상 학부모의 사교육비 지출 경쟁이었으며, 이 경쟁 속에서 나타난 학력 대물림 현상은 연세대, 고려대 같은 주요 '명문' 사립대들이 중상층 이상 출신의 학생들에게 거의 '점령'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2005년에 이르러서는, 서울대·고려대·연세대에 신입생으로 입학한 강남구 소재의 인문계 고등학교와 마포구 소재의 인문계 고등학교 학생 비율이 9 대 1이었다.

즉 소위 '명문대'의 상당수 학생들로서는 지금 '대듦의 정신'을 발휘하여 학교와 재벌의 유착관계에 반발할 현실적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경쟁에 내몰린 교수들, 진보적 활동은 이제 사치

교수는 어떤가? 1980년대의 유산 중 하나는 수적으로 적지만 꽤나 가시적인 소수, 즉 '명문' 사립대들을 포함한 여러 학교에 존재하는 진보 성향의 소장·중진학자들이었다.

1997년 이후 신자유주의적 정권의 정책은 이같은 소수가 재생산되지 않도록 만전을 기했다. 생존에 급급하면서도 남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처한 사람이 보통 '딴소리'를 내지 않는 경향이 있기에, 대학교수의 노동환경이 불안해졌으며 급여 격차가 격심해졌다.

이미 김영삼정권 때부터 '교육시장 개방에 대비하여 대학 경쟁력을 키운다'는 명분을 내세웠던 교육관료들이 학부제(학부 단위로 입학하여 1~2년의 교양과목 수강 이후에 전공을 선택하는 제도) 실시를 준비해왔는데, 1997~98년부터 학부제가 본격적으로 실시된 결과 전공 공부를 충분히 할 시간이 부족했던 졸업자들의 전문성이 떨어진 한편, 재벌이 주도하는 노동시장의 논리에 따라 학생들이 소수 '인기학과'에 쏠려 나머지 '비인기학과'들은 존폐의 기로에 몰렸다.

비판적 지식인들 상당수가 역사나 철학 같은 '비인기 전공'에 속해 있었는데, 이들은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거기에다 1999년 '교육공무원법'과 '사립학교법'이 개정되어 일부 부교수 및 정교수 들을 제외한 나머지 정규직 교원들을 계약제로 임용하여 탈락률이 높은 승진심사제를 도입할 법적 가능성이 생겼으며, 2002년부터 전임강사나 조교수 등 전임교원의 계약제 임용이 전면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했다.

2006년에 전체 승진심사 대상자 중 탈락하여 정년이 보장되는 직급으로 승진할 수 없게 된 '낙오자'들은 고려대 17.5%, 연세대는 심지어 57.7%나 됐다.

승진 때 점수로 환산되는 학술논문 저술 및 권위있는 학술지에의 발표 그리고 특히 결정권이 있는 선배동료들과의 관계 관리에 우선적으로 신경쓰고 (특히 결정권자들이 좋아하지 않을 성향의) 사회참여를 크게 자제해야 할 필요성을, 이제는 모든 사립대의 정규직 교원들이 느끼는 것이다.



교수사회도 양극화…연봉 9천만원 정규직 교수와 신분 불안에 떠는 비정년트랙 교원

정규직 교원이야 그나마 최소한의 여유와 기본적 위치가 보장되지만 2002~3년부터 계속 크게 늘어난 각종 '비(非)정년트랙 교원'(계약제교수, 연구교수, 연구전담교수, 강의전담교수 등) 절대 다수가 계약기간 1~2년에 최장 임용기간이 6년이다 보니 아예 논문저술과 '관계 만들기' 외의 다른 일에 마음을 쓸 여지가 없다.

사실 신분 불안과 저소득으로 연구에 전념하는 것마저도 곤란한 처지다.

대학 교원사회라는 피라미드의 하부에 있는 이들은 만성적 신분불안에 떨어야 하고 호구책에 급급할 수밖에 없지만, 정년 보장을 받는 소수의 고려대 정교수들은 평균 연봉 9천만원(최고 연봉 1억 8천만원)을 받는 등 사회 부유층으로서 손색이 없다.

연세대의 평균 1억 4백만원보다 약간 낮지만, 이른바 서울의 '중위권' 대학이나 '지방명문대'보다 약 1천만원 이상 많은 금액이다.

교수사회의 상층부가 지배구조에 거의 편입되고, 하층부가 생계적 불안에 시달리고 신분상승을 도모하는 데 전력을 쏟는 상황에서, 이건희가 졸지에 '철학박사'가 되는 일에 대한 강도 높은 반대가 고려대 교원 쪽에서 나올 수 있었겠는가?

비록 '비정년트랙 교원'이라 해도 한달에 1백만원을 벌기 어려운 시간강사에 비해 비교적 유리한, '잃을 것이 많은' 입장에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결국 수많은 직급과 직군으로 나누어지고, 경쟁구도 속에서 철저하게 핵화(核化), 원자화된 '명문대학' 교원들은 저항능력을 거의 상실하고 말았다.



명문 사학재단, 결코 '가난'하지 않다…쌓여만 가는 적립금, 캠퍼스에 들어설 백화점

사립대들을 재벌들의 하위파트너로 만드는 데는 역대 정권들도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김대중정부는 애당초 '국가교육재정 GNP 대비 6% 확보'를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2000년에 접어들어서도 실제 GNP 대비 교육예산은 4.6%밖에 되지 않는 등 참담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이 예산 중 고등교육 관련 예산은 9.7%(약 1조 2230억원)에 불과해 연구비를 포함한 하바드대 1년 예산(24억달러)8)에도 미치지 못하는 미미한 수준이었다.

사립대들이 평균 64.7%(2005년)의 기형적으로 높은 등록금 의존율을 보이는 상황에서는, 학교들이 재벌들의 기부를 받으면서 그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는 것을 '재정곤란' 탓이라고 얼마든지 변명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서울 소재 '명문대학' 재단들은 절대로 '가난'하지 않다. 예컨대 2006년 여름까지 연세대 재단의 누적적립금은 951억원에 달했으며, 전국 사립대학들이 보유한 기금 총액(5조 7000억원)은 금년 고등교육 예산총액(3조 7000억원)의 1.5배가 넘는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일관하는 국가는 최근 제자리걸음을 하는 사립재단들의 전입금을 높이려는 노력을 특별히 하고 있지 않으며, 사실상 대학들의 '돈 쌓아두기'를 방조하고 있다.

2007년 5월에는 아예 대학재단들의 제2금융권(펀드 등) 투자와 대학이 보유한 부동산의 상업적 임대를 허용하는 방침이 발표돼 캠퍼스에 백화점이 건설되는 상황까지 임박했다.

사립대 재단들은 그들대로 지금 돈을 쌓아두었다가 주식과 부동산 투자에 쓰려고만 할 뿐 학교에 대한 예산지원에 매우 소극적이며, 정부는 정부대로 고등교육 예산을 크게 늘리지 않은 채 사립재단들의 '돈 쌓아두기'와 투자열풍에 대한 행정적 지원으로 일관하고 있다.



'어용 교수'와 '안기부 요원'의 시대는 갔지만…'새끼 재벌'로 변신한 대학들

그런 와중에서 재벌의 기부금(5.1%)이 사립대학의 재정구조에서 국고보조금(1.1%, 2004년 통계)의 5배 가까이 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다.

'어용교수'와 총장실 바로 옆방에서 진을 치고 버티는 안기부 요원들의 시대가 가고, 1년에 4500만원의 등록금을 내는 고려대 '글로벌금융 경영전문대학원' 학생들이 삼성관과 LG-포스코관에서 영어로 수업받는 시대가 왔다.

국가의 적극적인 방조하에서 사립대학은 삼성 같은 '아비 재벌'들과 유착관계에 있는 '새끼 재벌'로 변신했다. 나는 2년 전 "고려대학교는 현직 국회의원들의 20%를 배출한 대한민국 최고 명문대학 중 하나"라는 영문 홍보자료를 보고 놀랐지만 기실 이처럼 로비력을 과시하는 것은 재벌로서의 '정상적 행동'이 아닌가?

'노는 땅'을 상가 짓는 건설업체에 임대해 떼돈을 벌고, 주식투자에 적극 뛰어들고, 재벌의 기부 유치에 목숨을 걸고, 학벌주의적 사회구조에 힘을 얻고, 임용이나 승진심사와 연구비 지원 등의 메커니즘을 동원하여 교수들을 원자화해 분리·통제하는 사립학교들에서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학문이 가능하겠는가?

사회에 대한 쓴소리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쉽게 나오겠는가? 물론 고려대 출교자들처럼 자기희생적으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용감한 소수'는 늘 있을 것이다.



이건희를 '철학자'로 명명한 고려대vs'정몽준 명예 철학박사'를 끝내 거부한 전남대

그런데 '다수'의 동향을 이야기하자면 '삼성관'들을 쉽게 유치할 수 있는 서울 소재 '명문대'보다 오히려 학벌주의 구조에서 계속 불이익을 받는 지방대학들에서 저항의 흐름이 점차 강해질 것 같다.

이건희를 '철학자'로 명명한 고려대보다는 철학과 교수와 학생의 반발로 정몽준에게 끝내 '명예 철학박사'를 주지 못한 전남대가 앞으로 비판적 지성의 고향이 될 확률이 더 높은지도 모른다.

안암골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참 아픈 이야기지만, "모든 권력이 권력자를 부패시키지만 절대적 권력은 권력자를 절대적으로 부패시킨다"는 말만큼이나 "모든 특권들이 양심과 양식(良識)을 마비시킨다"는 말도 옳을 수밖에 없다. '대듦의 정신'이 증발되는 날에는 관악골도 신촌골도 안암골도 죽고 만다.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