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유시민 - 대화록의 진실8 “2007남북정상회담의 막전막후(幕前幕後)”

우렛소리 2013. 9. 10. 16:35

대화록 해설 연재를 맺으며

 

지난 8주 동안 2007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해설을 연재했다. 내가 이 회담에 대해 남들이 모르는 무슨 특별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화록 전문을 포함하여, 내가 활용한 정보는 거의 전부 공개된 것들이다. 2009년 말 노무현 대통령 사후 자서전『운명이다』를 정리하면서 청와대 참모들 몇 분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분들이 준 정보도 특별한 것이 없었다. 자기가 아는 것은 직무상 취득한 기밀이고, 또 남북정상회담 관련 문서는 비밀기록 또는 ‘지정기록물’로 지정되어 국가기록원에 봉인해 둔만큼, 회담 당시 청와대가 공식 브리핑한 범위를 벗어나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옳다고들 했다. 나는 그분들에게서 들은 단편적인 정보와 공개된 자료를 토대로 파악한 남북정상회담 추진 경위를『운명이다』에 간략하게 적었다. 그때에는 내가 살아서 회담 녹취록 전문을 읽는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 대화록은 보통의 회담 기록과는 다르다. 대화록은 ‘10.4공동선언’이 만들어진 실제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회담 전후, 그리고 회담장 밖에서 벌어진 일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도 다양하게 제공한다. 반세기 넘게 이념적 군사적으로 대립해 왔던 ‘두 개의 국가’ 국정 최고책임자들은 각자의 고민이 무엇인지, 상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상대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솔직하게 토로했다. 대화록은 남북 정상이 처해 있던 상황과 생각, 의도가 어떠했으며, 그것들이 어느 지점에서 엇갈리고 합쳐졌는지를 있었던 그대로 드러냈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을 ‘대신해서’ 대화록을 해설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대화록에 등장하는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발언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최대한 냉정하게 독해(讀解)하려고 노력했다. 갈라진 민족의 재결합과 분단된 국가의 통합을 진지하게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대화록을 꼼꼼히 읽고 깊게 생각해야 한다. 국가권력 운용과 관련해 일정한 의사결정권 또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 예컨대 대통령과 장관, 정치인, 국회의원, 정치학자와 지식인, 언론인들에게 이 대화록은 더 큰 가치가 있다. 여기에서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알고 깨닫고 배우고 느끼는 만큼, 그분들이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의 공동번영에 기여하는 데 필요한 내용과 교훈을 더 많이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화록 전문을 꼼꼼하게 읽은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격동하는 감정의 파도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독해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인간 행위를 좌우하는 것이 이성만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때로는 감정이나 충동이 이성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한다. 국가정보원의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는 기본적으로 감정과 충동의 산물이었다. 처음에는 대통령선거에서 이익을 얻으려고 새누리당 정치인들이 내용을 누설했다. 그 다음에는 여론조작과 선거개입 행위에 대한 국민의 비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국정원이 대화록 발췌본과 전문을 공개했다. 새누리당 정치인들과 남재준 국정원장은 정치적 이해타산 때문에 대화록을 누설하고 공개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그런 행위를 한 배경에는 북에 대한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감정이 놓여 있다. 대화록에 나와 있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대중의 반응 역시 이성적 논리적이라기보다는 감정적 충동적인 면이 크다. 사람들은 전문을 차분하게 읽으면서 자기 머리로 생각하기보다는 언론보도의 제목과 발췌된 몇몇 문장을 보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우리 국민들의 마음 한편에는 북한식 사회주의 또는 권력세습에 대한 반감이 있다. 인민의 삶을 도탄에 빠뜨린 북의 권력집단에 대한 분노, 6.25 남침과 전쟁의 참화에 대한 복수심, 북의 무력도발에 희생당한 이웃에 대한 기억, 핵폭탄과 미사일 실험을 보면서 느낀 불안감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북의 존재를 정치적으로 악용해 독재와 부패를 저지른 자들에 대한 분노, 무지막지한 이념적 선동과 색깔론 공격에 대한 거부감,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전임 대통령에 대한 애틋함, 아직도 그와 싸우는 데 몰두하는 정부여당의 행태에 대한 혐오감이 있다. 그래서 인터넷 포털 사이트와 언론사 홈페이지는 이런 상반되는 감정을 표출하는 댓글로 뒤덮였다.

 

대중의 비이성적 감정 표출에 편승하거나 그것을 부추긴 대통령과 일부 정치인, 언론인, 지식인들의 행태는 실로 개탄스러운 것이다. 그들은 대화록의 특정 단어나 표현을 맥락에서 완전히 도려낸 채 인용함으로써 대중의 감정과 충동을 자극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피와 죽음으로 지킨 NLL’이라는 표현을 썼다. 맞다. 사실이다. 그걸 누가 모른단 말인가. 그러나 대통령의 임무는 NLL을 지키는 일에 계속해서 피와 죽음을 바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더는 그럴 필요가 없도록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이 대통령이 맡은 헌법적 책무이다. 이 발언은 대통령답지 못할 뿐 아니라 전임자에 대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정치도의마저 짓밟은 것이었다. ‘북에 NLL을 상납한 반역의 대통령’이라고 한 집권 새누리당 최고위원들의 말은 단순한 거짓말을 넘어선 정치적 망발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거짓으로 국민을 오도하고 파괴적 증오감을 부추기는 사람들이 국가를 제대로 운영할 리 없다.

 

비이성적 감정과 충동에 빠진 대통령과 장관들, 집권당의 유력 정치인들이 스스로 변화하지 못한다면 시민들이라도 이성의 촛불을 들어야 한다. 사람은 때로 감정과 충동에 휘둘리는 존재이지만, 그런 순간에도 누군가는 이성적 사유의 끈을 놓지 않고 견뎌냈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오늘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우리는 대화록에 담긴 남북 정상들의 고민, 그들이 시도했던 변화와 도전의 의미를 이성적으로 읽어내야만 한다. 오늘 마지막 회에서는 그렇게 하려는 의지를 가진 시민들을 위해 2007 남북정상회담의 추진경위와 회담의 흐름, 그리고 <10.4공동선언>의 부활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그동안 홈페이지를 방문해서 보잘것없는 글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2007 남북정상회담은 ‘비정상적’ 정상회담이었다

 

2007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한 실무책임자는 김만복 국정원장이다. 2006년 11월 임명장을 받은 날, 그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겠다고 보고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북미관계가 아주 나빴고 북한 핵문제를 다루는 6자회담도 잘 풀리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별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되기만 한다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한 번 추진해 보라고 했다. 김만복 국정원장은 북한노동당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을 파트너로 삼아 정상회담 가능성을 타진한 끝에 2007년 7월 북의 요청을 받고 평양을 방문했다. 이 시기 비공개 접촉의 과정과 내용은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처음에 잡은 회담일은 8월 27일이었다. 그런데 대홍수로 인해 북에 많은 인명피해가 나고 도로가 유실되는 등 여건이 좋지 않아 10월 2일로 바꾸었다. 조금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 분은『운명이다』(259-260쪽)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10월 2일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은 다음, 개성을 거쳐 평양까지 육로로 이동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직접 영접을 하고 환영 행사를 열었다. 그날 오후 5시부터 노무현 대통령은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먼저 회담했다. 여기서 김영남 상임위원장은 매우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상황은 네 번째 연재글 <친미국가도 자주를 할 수 있는가>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다.

 

회담 전망은 밝지 않았다. 실무협의에서 모든 안건을 합의하거나 확정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10월 3일 오전 백화원 영빈관에서 두 정상이 만났다. 오전 회담 두 정상의 기조발언 내용은 서로 크게 어긋났다. 생각과 소망의 차이가 매우 컸다. 합의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상호접근과 공감 분위기가 형성되고 반전의 징후가 나타났다. 우여곡절 끝에 오후 회담이 열렸고, 여기서 논의가 급진전을 이루었다. 회담은 오전과 오후 두 차례 약 네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남북 정상은 10월 4일 낮 ‘10.4공동선언’을 발표했다.

 

회담은 2007년 10월 3일 오전 131분과 오후 115분, 모두 246분 동안 진행되었다. 나는 이 회담 배석자가 아니다. 이재정 장관이나 김만복 국정원장 등 회담을 모두 지켜본 분들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분들은 언론을 통해 이미 알려진 것 말고는 별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대화록 전문을 꼼꼼하게 읽어 보면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전망이 극히 불투명한 가운데 경직된 분위기에서 시작된 회담은 아무 성과도 없이 끝날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결국은 많은 합의를 이루면서 마무리되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일부러 그런 흐름을 연출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화록을 있는 그대로 읽는다면, 이 회담은 누구도 미리 계획하거나 연출한 대로 흘러간 회담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남북 정상들은 매우 논쟁적인 담론(談論)을 주고받았다. 상대방 체제의 강점과 약점을 드러내놓고 건드리는 말이 오갔다. 결과는 좋았지만 과정은 험난했다.

 

 

오후 회담은 당일 오전에 결정되었다

 

앞의 글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회담의 흐름을 바꾼 것은 ‘자주’ 문제에 대한 토론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공동어로구역 설정 방안 하나만을 현안문제로 가지고 나왔다. 해주 등에 새로운 경제특구를 만들자는 노무현 대통령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부시대통령이 주선하는 3국 정상회담과 종전선언 제안에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정상회담은 오전 두 시간으로 끝내고 나머지 문제는 총리급회담이나 장관급회담으로 넘기려고 했다. 김만복 국정원장과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은 사전에 많은 협의를 하였지만 두 정상이 직접 대화를 통해 이룰 수 있는 합의가 어디까지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정상회담의 성과는 실무자들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지점까지 가버렸다. 이런 정황은 오전 회담 막바지에 이루어진 대화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노무현 대통령은 오후에 회담을 더 하자고 끈질기게 요구했다. 대표적인 것이 아래와 같은 대화이다.

 

  • 노무현 대통령: 위원장 질문이나 말씀을 안 하시면, 내가 이것저것 질문하고 싶은 것도 많으니까요. 오후 시간이나 잡아 주십시오.
  • 김정일 위원장: 뭘 더 얘기하지요? 기본적 이야기는 다 되지 않았어요?
  • 노무현 대통령: 올라올 때 오전에 확대 정상회담, 단독 정상회담 그렇게 알고 올라 왔거든요. 아침에 얘기 다 했으니까, 오후에 보지 말고 가라 이러면요…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오전 회의를 연장하거나 오후 회담을 할 의향이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다시 자주 문제 등을 거론하면서 한동안 토론을 이어나가자 그때서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오전 회담을 연장할 뜻을 내비쳤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물러서지 않고 오후 회담을 요구했다. 오전 회담 막바지 일정 관련 대화는 이렇게 이어졌다.

 

  • 김정일 위원장: 한 15분 휴식하고 마저 이야기하지 않겠습니까?
  • 노무현 대통령: 지금 15분 쉬면 12신데…
  • 이재정 통일부 장관: 오후에 시간 좀 주시죠.
  • 노무현 대통령: 그리고 우리 국민들도 두 번, 세 번, 네 번, 만나고 오라고 나한테 짐을 지워 보냈는데, 한번 만나고 가면 노무현 쫓겨 왔다 쓸 텐데, 위원장께서 날 그렇게 할 겁니까? 오후 시간 내주시는 게 그렇게 어려우시면 나도 내려 갈랍니다.
  • 김정일 위원장: 그럼 앞으로 자주 만나자고 했으니까, 자주 안건이 생기면 오시면 되지 않습니까.
  • 노무현 대통령: 자주는 다음 일이고 이번 걸음에 차비를 뽑아가야지요,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고 실제로요, 서해문제는 깊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위원장님 말씀도 듣고요.

 

노무현 대통령이 다시 NLL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역설했고, 김정일 위원장이 마침내 오후 회담을 수락했다.

 

  • 김정일 위원장: 그거 오후에 하지요 뭐. 오후 1시간 정도. 1시간 반 정도 예견해서… 오침 계시지요?
  • 노무현 대통령: 아무 때도 좋습니다. 위원장께서 편리한 때에…
  • 김정일 위원장: 오침 하십니까?
  • 노무현 대통령: 할 때도 있고, 안 할 때도 있고 그렇습니다.
  • 김정일 위원장: 나는 40년 동안 오침이라는 법을 모릅니다.
  • 이재정 통일부 장관: 대단하십니다. 훌륭하십니다.
  • 김정일 위원장: 조금 잠들면 그것도 설치고, 많이 자면 골 아프고….
  • 노무현 대통령: 다른 날은 오침이 되도, 오늘은 안 될 것 같습니다.
  • 김정일 위원장: (김양건에게) 2시? 2시 반?
  • 노무현 대통령: 2시 반 좋습니다. 2시도 좋습니다.
  • 김정일 위원장: 2시 반 시작해서 4시 끝나면…(김양건 부장에게) 내 회의도 저녁시간으로 다 돌려라. 오늘 외무성 사람들 몽땅 모여서 방향을 얘기하려는데… 노 대통령님의 끈질긴 제의에 내가 양보해서 2시 반에 하는 걸로…
  • 노무현 대통령: 얘기할 거리가 많아서 그렇습니다.
  • 김정일 위원장: 그리고 보도진에다 얘기하십시오. 토의문제가 대단히 많고 심도 있는 말들 많이…우리도 작가 노릇 해 봅시다. 그래서 오후에 더 한다. 그렇게 합시다.
  • 노무현 대통령: 감사합니다.

 

 

체류 연장 제안과 거절

 

2007남북정상회담이 보통의 정상회담과 달리 격식과 의전이 파격적이었다는 것은 오후 회담 결정과정뿐만 아니라 다른 면에서도 드러난다. 회담 직후 언론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느닷없이 하루 더 머물렀다 가라고 제안했고 노무현 대통령이 그 제안을 거절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대북정책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보수언론조차도 이 제안을 거절한 것에 대해서만큼은 호의적인 평가를 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오후 회담을 시작하자 곧바로 체류 연장을 제안했다.

 

  • 김정일 위원장: 내일 내가 떠나시기에 앞서 오찬을 하고자 하는데 이야기가 많아서…오늘 일정을 내일로 미루시고, 내일 오찬을 좀…일정을 좀 늦추는 걸로 제의합니다. 오늘 회의를 내일로 하시고…
  • 노무현 대통령: 아, 돌아가는 거요?
  • 김정일 위원장: 모레 아침에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오늘 오후 일정을…
  •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예.(청취불가)
  • 김정일 위원장: 대통령께서 결심 못하십니까?
  • 노무현 대통령: 큰 것은 내가 결심을 하고, 일부 작은 것은 의전, 경호실과 상의해야 합니다.
  •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청취불가)
  • 김정일 위원장: (청취불가)
  • 노무현 대통령: (청취불가).. 위원장 각별한 배려로 생각하고..
  • 김정일 위원장: 아니 뭐, 내가 아니고 우리 계획을 말씀드려.. 멋있게 모셔야죠.
  •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오후에 열뢰식 있고 그 다음에.. 그것은 안 하셔도 뭐..
  • 백종천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 (김양건 부장에게).. 김부장님, 실무자끼리 얘기하시죠.
  • 김정일 위원장: 그럼 회담을 그저 오늘로 끝내고, 모든 일정을 끝내겠다고 하면 원래 계획대로 하셔도 되고..

 

‘청취불가’는 국정원의 기술자들도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녹음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예기치 못한 체류연장 제의를 받은 노무현 대통령은 당연히 참모들과 의논했을 것이다. 김만복 국정원장과 김양건 통전부장 사이에, 그리고 우리측 배석자들 사이에 귓속말이 분주하게 오갔을 것이며,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양건 통전부장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청취불가’로 표현된 대화록의 공백은 그런 장면으로 볼 수 있다. 결국 백종천 안보정책실장이 김양건 통전부장한테 ‘실무자들끼리 이야기하자’며 직접 말한 시점에 가서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 제안을 철회했다.

 

“큰 것은 내가 결심을 하고, 일부 작은 것은 의전, 경호실과 상의해야 합니다.” 이 대답은 크게 칭찬받았지만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저 평소 습관대로 돌발 상황에 대처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큰 문제는 자기가 결정하지만 작은 문제는 참모들에게 맡기는 스타일이었다. NLL문제 해법이나 공동어로구역 설정 구상은 큰 것이다. 그러나 정상회담 일정과 의전은 작은 문제였다.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어가 평양까지 자동차로 간 것도 의전팀과 경호팀의 결정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일정 문제니 당연히 평소 하던 것처럼 의전팀과 상의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대답했다.『운명이다』를 쓰면서 취재를 할 때,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이었던 문재인 비서실장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나중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낭만적 정면 돌파’

 

2007 남북정상회담은 ‘정상적인’ 정상회담이 아니었다. 보통의 정상회담은 태권도 ‘약속대련’과 비슷하다. 실무자들이 미리 협의해 의제를 정하고 합의사항을 준비한다. 정상들의 직접 회담은 대개 그것을 확인하고 서명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특별히 정상들이 직접 조정해야 할 갈등사안이 없는 친교와 우호증진 목적의 회담인 경우 합의문과 성명을 미리 만들어 둔다. 정상들은 미리 준비한 원고 그대로 발언하며 통역하는 동안 다음 발언을 준비한다. 회담 과정에서 의제를 추가하거나 진전된 합의를 할 수는 있지만, 실무회의에서 준비한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런데 2007 남북정상회담 때는 의제에 대한 합의가 충분히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 합의문도 미리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대화록이 그 증거이다. 배석자도 균형이 맞지 않았다. 북측은 김양건 통전부장 한 사람뿐이었다. 중간에 김계관 외무성 부상이 들어와 막 끝난 6자회담 결과를 두 정상에게 보고했을 뿐 다른 배석자는 없었다. 하지만 남측은 이재정 통일부장관, 권오규 재정경제부 장관, 김만복 국정원장, 백종천 안보실장, 조명균 안보비서관 등 배석자가 다섯 명이나 되었다. 이것은 북이 체제 특성상 권력의 정보집중도가 더 높기 때문에 생긴 불균형이 아닌가 싶다.

 

통역이 필요하지 않은 회담이어서 두 정상은 상대방이 발언하는 도중에 자주 끼어들었다. 심지어는 상대방의 입장과 견해를 비판하고 반박하는 장면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오후 회담 막바지에는 쌍방 모두 예상하지 못했던 합의가 새로 이루어지고 이것저것 합의문에 넣으라는 지시가 이어진 끝에 화기애애하게 마무리가 된다. 태권도로 치면 시나리오를 미리 정하지 않은 ‘실전대련’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회담의 실전적 성격은 모든 이야기가 다 끝난 뒤 발표할 문건의 성격을 합의하는 대목에서 최종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북은 원래 오전 회담만 짧게 한 후 <6.15공동선언>처럼 추상적이고 짧은 선언문을 낼 계획이었다. 그런데 합의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동보도문’ 정도를 내는 것으로 하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은 형식과 내용 모두 남측 주장을 받아들였다. 다음은 대화록의 마지막 부분이다.

 

  • 김정일 위원장: 예. 이번에 뭐 선언문이라고 보도하나?
  •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원래는 선언문을 좀 토론했는데…. 합의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저 공동보도문으로 각기 표기하고 보도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하고 생각합니다.
  • 노무현 대통령: 선언으로 해주십시오.
  • 김만복 국정원장: 7천만 국민들이 다 기다리고 있고 두 분 정상분을 쳐다보고 계십니다.
  • 김정일 위원장 : 6.15 선언과 대등한 선언이라는 뜻인지요?
  • 노무현 대통령: 그렇지 않습니다. 후속 선언이죠.
  • 이재정 통일부 장관: 6.15 선언에 기초해서 발전되는…
  • 노무현 대통령: 선언 많이 합니다. 중소 간에도 선언했고 한중간에도 선언하고
  • 이재정 통일부 장관: 두 분 정상께서 처음 만나셔 가지고 이렇게 많은 합의를 하셨는데 그것을 선언으로… 하셔서 6.15 선언의…
  • 노무현 대통령: 한걸음 앞서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실무적인 회담은 아니니까요.
  • 김정일 위원장: 선언하는데… 그저 오늘 합의된 것… 그것 다 조항에 다 넣으시오.
  • 김만복 국정원장: 예 그러겠습니다. 김(양건)부장하고 협의해서 넣겠습니다.
  •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이번에 저희들이 선언을 기본 큰 선에서 선언문 제기했더랬는데…
  • 김정일 위원장: 조금 실무적인 문제들이 들어가겠구만.
  •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이제 제기된 문제들… 합의한 문제들을…
  • 김정일 위원장: 합의한 문제를 무게 있는 문장을 잘 만들어서 희망을 주고…
  • 노무현 대통령: 안되면 또 부속서를 만들어 가십시다.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포함해 많은 합의내용을 담은 8개항의 <10.4공동선언>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이런 방식으로 진행된 것은 북한 체제의 특수성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언론의 감시와 비판, 야당의 견제, 국민 여론을 고려하면서 헌법과 법률이 부여한 권한만을 가지고 회담에 나간 반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전체주의 체제의 최고 권력자로서 사실상 전권을 행사하면서 회담에 임했다. 중요한 합의는 정상회담에서 국방위원장이 결단하는 모양을 갖출 때만 성립될 수 있기 때문에 실무자들의 준비회담에서는 회담과 관련한 기본적인 사항만 합의할 수 있었을 뿐, 서로 의견을 달리 하는 중대현안에는 별다른 접근을 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북 정상 또는 정상의 대리인들이 서명한 합의문 가운데 가장 길고 내용이 많은 것은 19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이다. 이 합의서는 1년 넘게 이어진 고위급 회담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10.4공동선언>은 단 하루, 네 시간에 지나지 않았던 남북 정상 직접 대화의 산물이다. 두 정상이 회담 현장에서 합의해 만들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현장에 강한 사람이었다. 뚜렷한 낭만주의적 성향과 강렬한 어법 때문에 논란을 낳기도 했지만, 큰 문제일수록 정면 돌파를 선택하는 노무현 대통령 특유의 스타일이 아니었다면 <10.4공동선언>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낭만적 정면 돌파’는 전체주의 국가의 절대 권력자였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두 정상 사이에 형성된 공감과 신뢰의 분위기는 다른 사람들을 전염시켰다. 그래서 회담 막바지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자기 참모가 아닌 남측 배석자들에게 직접 지시를 내리는 풍경이 빚어졌다. 대표적인 장면을 보자.

 

  • 김정일 위원장: 선언하는데… 그저 오늘 합의된 것… 그것 다 조항에 다 넣으시오.
  • 김만복 국정원장: 예 그러겠습니다. 김(양건)부장하고 협의해서 넣겠습니다.

 

텍스트만 보아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시하면 김양건 통전부장이 “김만복 원장하고 협의해서 넣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게 맞다. 그런데 대화록을 보면 엉뚱하게도 김만복 국정원장이 대답한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만복 국정원장을 보면서 지시했기 때문이다. 조금 뒤에 이재정 통일부장관이 금강산관광 문제를 꺼냈다. 중국이 대대적인 금강산 관광사업을 벌이고 대한민국 국민들이 거기에 돈을 쓰는 것이 아깝다는 이야기를 나눈 다음 김정일 위원장은 또 김만복 국정원장에게 지시한다.

 

  • 김정일 위원장: 백두산 관광도 합의서에 넣으십시오.
  • 김만복 국정원장: 예. 넣겠습니다.

 

오전 회담 막바지에 분위기가 좋아질 징후가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달라진 것은 오찬 시간에 회담장 밖에서 두 정상이 한 일과 관계가 있었던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은 오전 회담이 어려웠던 이유가 북측의 의구심 때문인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참모들에게 북의 개혁이니 개방이니 하는 식의 우리식 표현과 사고방식이 남북관계를 열어가는 데 적절치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오찬장에 있던 북 요원들을 소통 창구로 활용한 것이다. 이 말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보고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같은 시간에 인민군 수뇌부를 만나 노무현 대통령이 제안한 해주 개방 문제를 상의한 끝에 긍정적인 답을 받고 회담장으로 나왔다.

 

대화록은 10월 3일 오전에 시작해 점심시간에 정회했다가 오후에 속개한 남북정상회담이 긴장감 높은 ‘실전회담’이었으며, 실무자들의 협상에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높은 수준의 합의를 거둔 매우 극적이고 성공적인 회담이었음을 증명한다.

 

 

대한민국, ‘정신적 난민촌’을 벗어나야

 

<10.4공동선언>의 핵심은 남과 북이 모두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경제협력을 확대 강화하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사항은 공동어로구역을 포함한 서해평화협력지대 설치였다. 이것은 경제협력 사업을 안정적 기반 위에서 펼치는 데 필요한 군사적 협력과 평화 보장 장치를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모든 합의가 순조롭게 실현될 것처럼 보였다.

 

2007년 11월 14일부터 사흘 동안 서울에서 남측 한덕수 국무총리와 북측 김영일 내각총리가 만나 <10.4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총리회담을 열었다. 이 회담에서 총리들은 49개항으로 된 <남북관계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이행에 관한 제1차 남북총리회담 합의서>와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추진위원회 구성운영에 관한 합의서>,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 구성 운영에 관한 합의서> 등 두 개의 부속합의서를 체결했다. 개성공단 통행 통신 통관의 대폭적 개선과 아울러 해주경제특구의 건설, 해주항의 활용, 한강하구의 공동이용, 민간선박의 해주직항로 통과,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설정 등 <10.4공동선언> 합의사항 실현을 위한 세부 사업계획과 추진일정도 마련했다.

 

그러나 11월 27일부터 사흘 동안 평양에서 열린 국방장관 회담에서 남북은 공동어로구역 획정과 관련한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북측은 우리의 북방한계선(NLL)과 자기네가 주장하는 해상군사경계선 사이 해역을 고집했고, 우리측은 NLL을 중심으로 남북 등거리 또는 등면적 해역을 주장했다. 국방장관 회담에서 이견이 어디까지 좁혀졌는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국방부는 NLL을 중심으로 한 등거리 공동어로구역 설정을 주장했다. 반면 해양수산부와 통일부는 NLL이 북의 해안선에 근접해 있다는 점과 북 해역의 황금어장을 최대한 포함시켜야 한다며 NLL 중심 등면적 공동어로구역을 설정 방안을 지지했다. 결국 ‘NLL 중심 남북 등면적 공동어로구역’ 설정 방안을 가지고 남북 국방장관회담에 임하기로 결정했다고 나는 알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안보실장으로 발탁한 김장수 당시 국방부장관이 그 내용을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 침묵하고 있는 것은 떳떳하지 않은 태도라고 할 수밖에 없다.

 

공동어로구역 설정 방식에 대한 합의가 나오지 않은 가운데 2007년 12월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0.4공동선언> 이행계획은 그것으로 사실상 끝이 났다. 이명박 정권 5년 동안 단 한 차례도 남북 국방장관 회담이 열리지 않았다. 당국간 비밀접촉이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되었지만 남북관계는 살벌한 대립과 갈등으로 치달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10.4공동선언> 합의를 이행할 의사가 조금도 없었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관광 중단,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등 최악의 정세가 조성되면서 대화가 완전히 단절되었다. 이명박 정부가 무효를 공식 선언하지는 않았지만, <10.4공동선언>은 사실상 사문화되고 말았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개성공단마저 문을 닫았다. 최근 들어 다행히 남북은 개성공단 재가동에 합의하고 실무회담을 이어나가고 있다. 오랜만에 한가위 이산가족 상봉행사도 열릴 예정이다. 아직 일시와 장소를 합의하지는 못했지만 금강산관광 재개를 위한 접촉도 곧 시작될 전망이다. 이 모두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한계는 명확하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전에 이미 이루어지고 있던 남북교류와 경제협력 사업을 복원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만약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없다면 무엇인가 결단해야 한다.

 

그것은 <6.15공동선언>과 <10.4공동선언>을, 더 나아가 <남북기본합의서>와 <7.4남북공동성명>을 복권시키는 결단이다. 이 합의들을 관통하는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정신을 되살리는 일이다. 이렇게 하려면 대한민국 국민들이 ‘난민촌 정서’를 벗어던져야 한다.

1948년 정부를 수립했을 때 대한민국은 단순한 분단국가였다. 그러나 6.25전쟁을 거친 다음에는 일종의 ‘난민촌’이 되었다. 이 ‘난민촌’의 구성원은 원래 38선 이남에 거주하던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북 정권의 탄압을 피해서, 공산당의 독재가 싫어서, 미군의 폭격이 무서워서, 또는 다른 이유로 휴전선 이남으로 넘어온 사람들도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어떻게든 먹고 살면서 북의 침략 위협에서 공동체를 지키는 것이 ‘난민촌 대한민국’의 목표였다. 물론 오늘의 대한민국은 ‘난민촌’이 아니다. 그러나 그때 만들어진 ‘난민촌 정서’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때는 모든 것이 어려웠다. 대한민국은 북과의 대결에서 모든 면에서 수세에 몰려 있었다. 두려움과 열등감을 가질만한 상황이었다. 엄청난 과장 홍보를 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김일성 주석과 그 참모들이 일제 강점기에 항일무장투쟁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독립운동가 출신인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아 권력을 행사했다. 경제적으로도 북에 뒤졌다. 광업과 제조업, 발전(發電) 등 일제강점기 조선의 중심산업을 차지한 북은 강력한 중앙통제식 계획경제를 실시해 단기간에 생산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경직된 반공주의 이념에 사로잡혀 국가의 경제발전계획을 수립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대한민국은 외국의 원조에 의지해 살았다. 정치적으로도 크게 나을 것이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부(國父)’행세를 하면서 독재와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대한민국은 민족사적 정통성, 경제적 효율성, 민주적 정당성 등 국가의 정통성을 만들어내는 요소들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50여 년 동안에 전혀 다른 나라로 바뀌었다. 친일파를 법률적 정치적으로 응징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현실의 무대에서 생물학적으로 퇴장했다. 친일행위와 친일파 청산 실패의 역사를 제대로 해석하고 미래를 위해 필요한 교훈을 찾고 배우는 과제가 남아 있다. 대한민국은 믿기 어려운 경제적 발전을 짧은 기간에 이루었다. 아직 많은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잘 헤쳐나가리라 믿는다. 민주주의도 세워냈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합헌적 평화적으로 정권교체와 역(逆)정권교체를 실현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 국가라는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고 본다. 비록 그 출발은 비루하고 초라했지만 우리 국민들은 땀 흘리고 투쟁하고 희생하면서 그 대한민국을 정통성 있는 국민국가로 만들어냈다. 우리가 만든 현대사에 스스로 자부심을 느낄 자격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1972년은 대한민국이 1인당 국내총생산을 비롯한 주요 거시경제 지표에서 북을 따라잡거나 역전한 시점이었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했을 때는 남북의 체제경쟁이 이미 끝났다고 판단하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는 자체붕괴를 일으켰다. 남북의 경제력 격차는 이미 상당한 수준이었고 앞으로 더 확대될 것이 분명했다. <6.15공동선언>이 나온 2000년에 북은 심각한 경제위기에 빠져 인민의 기본 의식주조차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10.4공동선언>은 이런 토대 위에서 나온 것이었다. 북은 생존을 위해 남과의 경제협력을 원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북과의 경제 군사적 협력을 통해 3면은 바다로 북쪽은 철조망으로 차단된 ‘섬나라’에서 벗어나 대륙으로 나아기려고 했다. 그 토대 위에서 정전협정 체제를 평화협정체제로 변경함으로써 북핵 문제를 해결하고 전쟁의 위험이라는 ‘코리아 리스크’를 해소하려고 했다.

 

남북관계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은 여럿 있다. 북의 소심하고 경직된 태도와 호전적인 언어습관, 핵실험이나 연평도 포격과 같은 도발행위가 그런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심각한 걸림돌은 ‘난민촌 정서’이다. 이 정서는 북에 대한 두려움, 증오심, 혐오감, 복수심과 같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냉정하게 본다면 북은 이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증오심, 혐오감, 복수심은 이해할만한 것이지만 전쟁을 막고 민족의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를 생각한다면 극복해 나가야 할 감정이라는 데 이론이 없다. 그런데 북이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과 행동을 할 때마다 ‘난민촌 정서’가 폭발한다. 최근 불거진 이석기 의원 등의 소위 ‘내란음모 사건’이 모든 이슈를 삼키는 정치적 블랙홀이 된 것도 근본적으로는 우리 국민이 지닌 ‘난민촌 정서’의 폭발력 때문이라고 나는 판단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난민촌 정서’를 자극해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었으니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는 그것을 부추기고 편승했지만, 대통령이 된 만큼 이제는 그것을 해소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그것이 대통령이 할 일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북의 ‘암살위협’을 받았다. 소위 ‘1.21사태’였다. 1968년 1월 무장한 북 특수부대원 31명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서울까지 침투했다. 그들은 박정희 대통령과 정부요인을 암살하는 임무를 받고 온 정예요원들이었다. 청운동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해 경찰과 맞닥뜨린 그들은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난사해 경찰과 민간인들을 살상했다. 우리 군경은 28명을 사살하고 김신조 한 사람을 생포했다. 두 명은 끝내 찾지 못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박정희 대통령은 예비군 제도를 만들었다. 같은 방식으로 보복하기 위해 실미도에 특수부대를 창설해 훈련을 시켰다. 이것이 바로 나중 영화로 나온 ‘실미도 부대’였다.

 

그렇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그로부터 겨우 4년이 지난 1972년, 이른바 ‘데탕트’라는 국제정세의 변화를 맞아 평양에 밀사를 보냈다. 대리인들이 서명한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해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원칙에 합의함으로써 민족의 화해와 평화적 통일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디뎠다. 그에 비하면 박근혜 대통령은 훨씬 좋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다. 그는 야당 정치인 시절 평양에 가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환담한 적이 있다. 게다가 북은 경제난 극복을 위해 남의 협력과 지원을 바라고 있다. 이석기 의원 사건에 대해 북이 예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논평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북이 진지하게 남북관계 개선을 원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게 합리적이다. 대한민국 국민의 ‘난민촌 정서’를 극복하는 데는 평소 북에 유화적인 태도를 취해 온 정당과 개인보다는 누구보다 강경했던 박근혜 대통령이 나서는 게 훨씬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나는 판단한다.

 

대화록 해설 연재를 마치면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건의해 보고 싶다. 나는 그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그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다. 민주공화국 시민으로서 대통령에게 무엇인가 건의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이라 믿는다. 박근혜 대통령님, 조용한 저녁 시간에 대화록 전문을 차분히 읽어 보십시오. 참모들이 만든 발췌본은 멀리 하십시오. 대화록에서 전임자들의 고뇌와 꿈을 읽어 내십시오. 그렇게 하면 대한민국 제 18대 대통령으로서 그대가 걸어가야 할 길이 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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