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소셜 리버럴 1 - 세모난 동그라미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서프라이즈 / 귄터반트 / 2008-12-23)
소셜 리버럴은 세모난 동그라미일까?
소셜 리버럴에 대해서 일찍이 진중권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소셜리버럴'이라는 개념은 유시민이 먼저 꺼낸 것으로 기억합니다. 여기서 '리버럴'이 정치문화가 아니라 경제정책을 가리키는 개념이라 할 때, 소셜 리버럴은 '둥근 삼각형'과 같은 형용모순이라고 할 수 있지요. '소셜'은 시장에 대한 국가의 복지주의적 개입을 함축하는 반면, '리버럴'은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배제하거든요. 경제적 '리버럴'은 복지 같은 것은 국가적 과제가 아니라 개인이 알아서야 해야 할 개인적 과제로 치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이 의미를 갖는다면, 아마도 김대중 정권이 얘기하던 '생산적 복지' 어쩌구 하는 개념 정도를 가리킬 겁니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하게 몰아붙이는 가운데, 거기서 발생하는 필연적 문제를 '무늬만 복지'로 대충 가려보겠다는 거죠. 노무현의 정책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밑에 어느 분이 지적했듯이, 수렵을 자유화하면서 동물원 우리에 갇힌 원숭이에게 바나나 하나 더 주며 동물사랑을 자랑하는 격이지요(2004.1.21 진보누리에서 진중권)."
경제적 의미에서의 자유(liberal)는 몇 가지 다른 부가적 의미를 파생시킨다.
첫 번째 자유의 의미는 시장의 자유이다. 정부가 시장에 대해서 통제하지 않음으로써 당연히 귀결되는 자유이다. 여기에서 두 번째 자유가 도출된다.
두 번째 의미의 자유는 시장경제의 자유라는 체제 안에서 새로이 도출되는 자유다. 이러한 자유의 긍정적 의미는 나중에 다루기로 하고 부정적 의미의 자유는 진중권 교수가 말했다시피 '수렵을 자유화 하면서~~'에서 드러나는 자유다.
법(法)이 존재하지 않는 무법천지의 원시시대에서 약자는 강자에게 수렵 당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즉 이러한 자유는 절대적으로 강자에게만 유리한 자유라는 의미이다. 약자와 강자를 어떠한 통제도 없이 풀어놓고 자유경쟁 시키면 학살당한다는 의미이다.
세 번째 의미의 자유는 반개혁적 의미의 자유다. 진보나 개혁이라는 것은 다른 의미로 볼 때 새로운 규칙을 정한다는 것의 다름이 아니다. 그런데 '자유선언'을 해버리면 새로운 규칙의 도입이 없다는 의미가 된다. 결국 과거 청산이 안 된다는 의미다. 이는 두 번째 의미를 부연할 뿐 아니라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예정적 성격이 짙다. 여기에서 또 한가지 부정적 의미의 자유가 파생된다. 즉 '기득권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새로운 규칙을 정하지 않으니까...
'과연 그러기만 한 것일까?'는 차후에 이야기하고 먼저 유시민 이야기부터 하기로 한다.
빽바지 유시민(천성적 리버럴리스트)
소셜 리버럴(social liberal)은 경제관념으로서 정부는 시장을 통제하지는 않되, 사회복지에 대하여서는 일정 부분 책임지겠다는 정치적 성향이다. 그러므로 정치성향으로 본 리버럴과 개인성향의 리버럴은 전혀 별개의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앞으로 이야기하려 한다.
그의 누나인 유시춘씨의 증언에 의하면 "유시민은 철저한 자유주의자예요. '울트라 수퍼 리버럴리스트'예요. 내가 한번은 우리 아들이 고등학교 때 이상하게 장발을 하고 다녀서 스트레스 받는다고 말했더니, '지 머리, 지가 하는데, 왜 그래요? 누나. 걔 머리가 누나한테 해주는 거 있어요? 지 머리 가지고 지가 장난하는데, 왜 그래요?' 하더라고요." 으로 말한 것으로 보아 그가 국회에 빽바지를 입고 등원한 것은 단순한 헤프닝이 아니라 천성적인 것으로 보인다.
개인과 팀은 다르다(팀플레이어로서의 유시민)
위의 사실로 보건대 유시민은 다분히 반항아적인 면이 짙다. 개인적 취향의 의미로서 제임스 딘 같은 반항은 좋을지 모르나 정치적 의미로서 제임스 딘 같다면 문제점이 커진다.
과거 열린우리당 시절 그를 보면 제임스 딘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그러한 모습은 천정배나 임종인, 김영춘, 김근태에게서 찾아볼 수 있고 그는 유시민으로 존재하기보다 노무현의 분신처럼 보인다.
노무현 대통령의 잘못에 대하여서는 일체 침묵한다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하고 있다.
"날마다 일상적으로 전투를 치르는 듯한 대립구도 속에 있는데 거기서 내가 주관적으로 철학적으로 혹은 이론적으로 생각한 대로 말한다? 그거는 아니다. 지금은 전투 중이며 전투 중일 때는 자기 지휘관을 험담하는 게 아니다. 그건 남들이 하는 것이다. 저쪽 편에서 비난방송 나오고 할 때 듣고 마는 것이지 거기 일부 옳은 점이 있다고 해서, 내가 거기 동조해 맞아 우리 사령관은 이런 게 문제가 많아 이러면 멍청한 거다."고 말하며 "그러한 것은 정권이 끝난 후에나 가능한 일이다."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관점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소속되었느냐 아니냐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고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그는 강조하고 있다. 정치에 가담을 일단 하게 되면 팀플레이를 해야 하며 제3자 입장을 애써 고수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보인다. 그는 어떠한 입장을 고수하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바뀌어야 함을 강조한다.
또한 그는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참여를 대단히 강조한다. 인터넷을 통하여 개인은 개인을 넘어서 사회화하고 사회적 의미로서의 자아를 새로이 발견한다는 것이다.
개인과 사회, 개인과 팀플레이어로서의 이러한 상관관계를 두고 유시민에 대하여 비판적인 강준만 교수도 『유시민 : 항소이유서』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유시민 비판자들이 한 가지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은 유시민은 지금 내키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출세나 권력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은 '지방대 교수'다. 유시민이 열린우리당 의장이 된다 해도, 설사 그가 대통령이 된다 해도 그건 조국을 위한 희생이지 그가 원해서 하는 일은 아니다. 그가 다른 정치인들에게 독설을 퍼부을 수 있는 힘도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이러한 희생에 대해서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현재 어디에 와 있고 내 역할은 무엇인지, 자신을 객관화하여 스스로를 역사 속에서 통시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놀랍도록 자연스러워 그에 따른 전술 전략을 자신의 이익보다 먼저 따져 내는 것이 거의 비인간적인 수준에 도달한 그는, 당대의 돌쇠다."
유시민 자신도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상처야 입겠지만, 지금 꼭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제때 해야 한다. 내가 나중에 더 큰 일을 하고 안 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고, 우리 당이 대한민국의 미래나 우리 민주주의의 발전이나 사회 발전을 생각할 때 지금 시점에서 꼭 해야만 하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한다."
전체주의에 항거하는 유시민(反 전체주의자 의미로서의 리버럴리스트)
그의 약력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1959년생. 경북 경주 출생.
- 1978년 서울대 경제학과 입학.
-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으로 서울역 시위를 주도해 그 해 5월 17일 계엄포고령과 집시법 위반 혐의로 구속 제적된 뒤 3개월 만에 풀려나 같은 해 9월 군에 강제 징집.
- 1984년 9월 복학한 그는 복학생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한다. 그러나 서울대에 들어온 외부인을 프락치로 알고 집단 구타한, 이른바 '서울대 학원 프락치 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면서 두 번째로 제적. 그는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는데, 이때 옥중에서 작성한 '항소이유서'는 서슬 퍼런 기개와 논리 정연한 문장, 진솔한 내용으로 유시민이란 이름을 하나의 전설로 만들었다.
- 1985년 10월 만기 출소한 유시민은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등 재야단체에서 활동.
- 1988년 여름에 재복학하여 약 2년 동안 당시 평화민주당 이해찬 의원의 보좌관으로 5공 청문회 광주특위 등에서 활약(이때부터 이해찬 전 총리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알게 됨. 이 두 명의 사람 이외의 사람에 대해서는 개인적 교분을 쌓는 것을 극도로 꺼림).
- 1991년 13년 만에 서울대학 졸업. 이후 그는 계약직 공무원으로 7개월 정도 한국학술진흥재단이란 정부 산하 단체의 기획실장으로 근무했고, "역사 발전에 의미 있게 참여하기 위해서는 좀 더 정확하고 깊이 있는 지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독일 유학을 떠남. 독일 마인츠의 요하네스구텐베르크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이후 박사과정을 밟음.
- 1998년 IMF 이후 귀국, 시사평론가와 자유기고가로 활동.
- 2002년 11월 16일 2002년 대선을 앞둔 시점서 부패청산, 국민통합, 참여민주주의, 인터넷정당의 기치아래 개혁당을 창당. 공동대표로 김원웅 의원과 유시민이 맡음.
- 2004년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
그 후의 약력은 생략.
소셜 리버럴리스트로서의 유시민(불온한 사상가 유시민)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새로운 사상치고 처음에 불온하지 않았던 것은 없다. 세상을 보는 눈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는 상이한 여러 사상 사이에서 대립과 경쟁을 거쳐야 알 수 있다."
그는 또한 진보가 무엇이냐 개혁이 무엇이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불온하게 대답한다.
"진보는 시대마다 사회마다 내용이 다르다. 진보는 때로는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인 선을 향해 가는 것이 진보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현존하는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는 노력이 진보일 수도 있다."
즉 그에게 진보는 눈앞에 닥친 문제를 재빠르게 해결하는 것이란다. 완벽한 이론보다 당장의 문제 해결도 진보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또한 소셜리버럴이란 형용 모순이며 세모난 동그라미라는 지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관념 속에서는 형용 모순이고 현실 속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론이나 관념에서는 모순 덩어리이고 형용 모순이지만 현실에서는 가능하단다. 종합해 보건대 그가 자신과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노선을 "유연한 진보"라고 달리 부를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편에 계속.
ⓒ 귄터반트
소셜 리버럴의 학문적, 역사적 배경을 소개합니다
(서프라이즈 / 스나이퍼 / 2008-12-23)
유시민 전 장관이 참여정부의 노선을 '사회자유주의(Socilal liberal)'라고 말하자 여기저기서 해석은 하고 있지만 명확하게 개념 정리는 안 된 듯합니다. 일단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소셜 리버럴은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각종 정치체제의 개념을 비교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 사회자유주의(Social liberalism) : 자유주의(시장경제체제)를 토대로 공정한 분배를 강조.
● 공산주의(Communism) :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생산수단의 공유가 필요하며 이를 폭력적 혁명에 의해 달성하자는 노선.
●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관리를 주장하며 이를 민주주의적(의회의 다수결을 통한)인 방법으로 쟁취하자는 노선.
솔직히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개념을 갖다놓고 정리해야 합니다만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핵심적인 개념만 정리했습니다.
여기서 '민주주의(Democracy)'라는 개념이 문제가 되는데요. 민주주의는 어떤 정치체제에서도 기본으로 깔고 가는 이념입니다. 마르크스도 민주주의를 지향한 것이니까요. 민주주의라는 것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원리라고 한다면, 그 어떤 정치철학도 이를 배제하지는 않겠지요. 그래서 '민주주의'가 붙었느냐, 안 붙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본바탕에 깔렸으니까.
소셜 리버럴이라는 개념은 '영국의 지성'이라고 불리우는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에 의해 생겨난 개념입니다. 밀이 태어나서 살았던 시기는 시민혁명 직후입니다. 프랑스는 혁명에 의해, 영국은 국왕과 귀족, 시민 간의 타협에 의해 민주주의가 막 시작되었던 시기입니다.
산업혁명 이후 상인계급의 힘이 강해지면서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동시에 성장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빈부격차가 심해지면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이론도 함께 성장하였던 시대입니다.
밀은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자입니다. 인간의 자유(사유재산권 보장, 신체의 자유, 사상의 자유 등)를 최고의 가치로 세웁니다. 여기까지는 자유방임주의를 주창한 아담 스미스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빈부격차 확대 문제에 관해서는 마르크스를 비롯한 공산주의자들만 고민한 게 아니었습니다. 이건 자유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로 J.S.Mill이 그런 자유주의자입니다.
19세기 영국은 계급 간 타협(왕, 귀족, 시민)으로 민주정치가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국가권력의 억압'은 줄어들었습니다. 문제는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한 '자본의 억압'이 생겨난 것입니다. 밀은 '자본의 억압'을 '자유의 적'으로 규정하게 됩니다.
'자본의 억압'을 '자유의 적'으로 인식한 것은 마르크스와 동일합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을 타도하는 방향으로 간 것이고, 밀은 자본의 존재를 인정한 위에서 자본의 억압을 해소하는 방법을 찾게 됩니다.
여기서 나온 것이 바로 '사회적 자유주의(Social liberalism)'입니다. 공정한 분배를 통한 사회개혁을 주창한 것입니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의 개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밀의 사상은 영국과 미국에서 호응을 얻었으며, 영국에서는 노동당이, 미국에서는 민주당이 이 노선을 발전시켜 오고 있습니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도 사회적 자유주의를 주창하였는데, '개인의 자유'와 '공정한 분배'를 동등하게 강조하는 밀의 입장과 동일합니다. 미국의 오바마 새 정부도 비슷한 노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민주당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한 폴 크루그먼 교수가 쓴 <미래를 말하다>의 원래 제목이 <The Conscience of a Liberal>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Liberal은 진보주의자로 해석됩니다. 적어도 영국과 미국에서는 Liberal을 단순하게 '자유주의'로만 해석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 반대편의 보수주의(Conservatism-영국의 보수당, 미국의 공화당)와 대비되기 때문입니다.
어떻든, Liberal이라는 단어에 함몰되지 말라는 의미에서 덧붙여 설명을 드린 것이구요.
소셜 리버럴은 '인간의 자유'와 '공정한 분배'를 동시에 추구해나가는 노선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습니다. 소위 성장이냐? 분배냐? 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뛰어넘자는 것입니다.
참여정부의 경제정책 기조가 뭐였습니까? 바로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추구한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를 기준으로 말할 때는 좌파정책이냐? 우파정책이냐? 라는 구닥다리의 좌우 갈라치기는 아무런 실익도 없는 관념적 놀이에 불과하다는 말씀도 덧붙입니다. 좌면 어떻고, 우면 어떻습니까? 그게 뭐가 중요하죠? 좌우가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기나 합니까? 좌는 무조건 선이고, 우는 악이라도 됩니까? 따라서 참여정부 노선이 중도좌파다, 아니다 중도우파다 라는 논의 자체도 아무런 실익이 없는 쓸데없는 말장난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이런 수준은 이제 극복할 때도 됐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인간의 삶이 오늘보다는 내일, 내일보다는 모레, 점점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게 좌냐 우냐 따위는 중요치 않습니다. 성장이 먼저냐, 분배가 먼저냐 이런 논쟁에서 벗어나 유연하게 사고하자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유연한 진보'가 아닌가 합니다.
소셜 리버럴리즘을 주창했던 밀의 어록을 하나 소개하면서 마칩니다. 개인적으로 '생존 없는 자유는 공허하고, 자유 없는 생존은 맹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생존의 문제가 해결된 다음 인간이 가장 강하게 욕망하는 것은 자유이다."
(진중권이가 예전에 유시민이 소셜 리버럴을 말하니까 '형용 모순'이라고 비웃던데요. 진중권은 이 세상이 '반대말'로만 이루어진 세상인가 봅니다. 제 글은 진중권을 비웃어주는 글이기도 합니다)
ⓒ 스나이퍼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1&uid=188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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