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제 막 사물을 인지하고 가치를 깨달아 가는 아이에게 어른들이 쉽게 던지는 질문이다. 이때 아이의 부모는 그 질문에 재미있어하면서도 약간은 긴장한다. 아이의 입에서 나올 대답이 아이사랑에 대한 평가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질문을 받은 아이의 심리상태는 어떠할까? 아마도 두 가지 점에서 갈등을 겪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엄마 아빠 중 누가 더 좋지? 하는 내적인 질문 때문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 뭐 이런 질문 같지 않은 질문은 던질까? 하는 어이없음 때문일 것이다.
"당신은 우리 대한민국의 발전과 삶의 질적 향상을 위해 자유와 평등 중 어느 쪽 가치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당신의 진지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답변을 들으며 아득한 기분에 빠지곤 했다. 그들은 이 질문이 본질적으로 최초로 자신을 갈등에 빠트렸던 질문과 매우 유사한 것임에도 전혀 눈치 체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질문이요, 라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것은 아이와 같지만, 그 방향이 아주 다른 것이다. 인간 사회에 있어 자유를 아버지로, 평등을 어머니로 등치시킬 수 있다면, 내용이 아니라 질문 자체가 형편없음을 바로 눈치 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은 이미 '자유만~~주의자'들이 펼쳐 놓은 매트릭스에 함몰되어 어머니의 존재를 망각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예전에 현명한 판단을 한 아이처럼 '자유도 소중하고, 평등도 귀한 가치입니다' 라고 대답하는 이를 찾아 나섰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우리 반도 땅에 최초로 그 말이 등장했던 조선 말 개항기 이후, 많은 사상가들과 정객들의 입술 움직임을 낫낫이 뒤벼보기도 하고, 수많은 책을 섭렵하기도 했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 일은 처음부터 무망한 일이었다. 조선말 개혁가라 평가를 받고 있는 김옥균, 박영효으로 시작하여, 김구, 김일성, 여운형, 박정희, 김대중에 이르기 까지 피아 구분 없이 세심하게 살펴보았지만, 별로 얻을 것이 없었다. 서양에서처럼 자유와 평등에 대한 소중한 인식을 혁명으로 쟁취한 경험을 가지지 못한 우리의 경험은 그를 왜곡하기 일수였다. 가슴은 여전히 유교적 질서로 꽉 차있으면서 입술로만 평등을 말하는 이가 있었는가 하면, 밖에서는 자유가 아니면 죽을 것처럼 굴다가도 막상 집에 돌아와선 자신의 아내조차 쥐 잡듯이 하는 독재자의 모습을 부끄럼 없이 보여주는 이도 있었다.
동의하겠는가? 아니면, 그 말고 어떤 이유가 더 있는가? 이렇게 친절하게 풀어 주어도 이해가 잘 안된다면 그를 좀 더 명확하게 증명해기 위해 '자유'와 '평등'의 실체적 진실을 분석하기로 하자. 좀 현학적이고 복잡해 보여도, 참아주기를... 크크... 이런 긴 글을 고료도 없이 쓰는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말이다^^*
잘 알고 있다시피 '자유'의 사전적인 의미는 외부의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함이다. 그를 철학적인 의미로 조금 더 확장하면 강제에 대립하는 의미로, 때로는 필연에 대립되는 요소가 된다. 이러한 의미로만 자유를 파악한다면, 인간이 이기적 유전자에 의해 행동한다고 볼 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존숭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조선일보 등은 이런 사전적 의미의 자유를 자사 진열대 가장 전면에 새워놓고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야말로 사전적 의미로만 의미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코 현실에서 구현할 수 없는 선언적 의미거나 일종의 환상에 불과하다.
우리 한 번 '자유'라는 말을 사전에서 꺼내어 실제적인 삶속으로 내던져보자. 그러면 그 자유는 금방 자유를 잃게 되어 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인간과의 관계이고, 이 인간관계 속의 '자유'는 바로 낮은 상태의 권력의지로 작용한다. 즉 사전적 의미의 자유는 내가 누구를 강제하거나 나를 강제 당하게 하는 요소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강제', 또는 '필연'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상대나 대상을 평등적 관점에서 대해야 한다. 다시 말해 자유란 인간 간의 관계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평등'적인 자세나 시선으로 타인을 대할 때만이 자신을 강제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유를 유시민도 말하고, 조선일보도 말함은 무엇 때문인가? 그에 대한 답은 일전에도 잠깐 언급한 적이 있다. 유시민은 앞서 설명한 인간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구현되는 자유, 평등과 등위로서의 자유를 말하고 있는 반면, 조선일보는 폭력을 숨기고 있는 자유(마음대로라는 사전적 의미만을 강조하면 인간 속의 자유는 타인의 의지를 강제하는 폭력만 남게 된다) 말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다. 따라서 우리가 좀 더 성숙한 인간이라면, 그리고 사전적 의미의 자유가 타인을 강제하는 것보다 나를 강제하는 요소가 큰 약자라면 당연히 조선일보에서 말하는 자유를 멀리해야 함이 옳다.
그런 당신은 아직도 조선일보 등이 구축해 놓은 '더러운' 강자(강자는 나쁜 의미가 아니므로)의 메트릭스에 빠져 있다고 봐야한다. 슬픈 일지지만 그렇다. 아직도 그런 사람이 태반을 이루고 있는 곳이 대한민국이다. 그들은 그토록 신성해 보이는 자유가, 나경원의 예쁜 얼굴이 악마의 발톱 한나라당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폭압적인 폭력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 혹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우리가 바로 잡아야 할 역사고 과제이며 또한 여기 이렇게 모여 있는 이유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우리 스스로 쟁취해 본 역사를 가지지 못했다. 그저 외세에 의해 선택을 강요받은 것일 뿐이다. 그에 대한 훈련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세계 최고의 기록 유산으로 평가받는 조선왕조 실록에서 '자유'와 '평등'이라는 단어를 검색해보면 '해당 자료 없음'이라는 안내창이 뜨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이들 가치에 대한 인식이 균형점을 이루다가 남한에서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일제 부역자들의 손에 '자유'가 더럽게 왜곡 선점되고 강대국들의 대리로 이념전쟁을 치루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결과 지금 우리가 보는 바와 같다. 우리는 어느 틈에 '평등'을 말하려면 '빨갱이'라는 욕을 들을 각오를 하기에 이르렀다. 마치 평등은 애초부터 공산주의에 종속이나 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잘못된 인식이고 이해이다. 그 반증으로 1770년부터 자유혁명과 공산혁명을 공히 지켜본 프랑스의 삼색기(Le drapeau tricolore)가 여전히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정신을 담고 펄럭이고 있는 것만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지금 이명박 정부는 이러한 자유와 평등에 대한 왜곡을 더욱 삼화시키고 있다. 금년 10월 1일 국정원의 원훈을 '자유와 진리를 위한 무명의 헌신'으로 바꾸어 표석에 새겨 놓음으로써 그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자유'와 '진리'를 등치시킴으로서 '자유는 곧 진리다'라는 이념을 은연 중에 강요하고 있으며 동시에 평등을 아에 없애려 하고 있다. 참으로 개념없는 행태를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 저들이 말하는 자유란 약자를 착취하기 위한 기만이지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가 아니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이 정부의 그런 무모함에는 앞서 자유와 평등에 대한 질문을 던졌을 때 여기저기서 합창으로 들려오던 답, '자유요'라는 확신에 찬 당신의 그 말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아픈 추억을 하나 가지고 있다. 1990년 소비에트가 해체되었을 때, 꼬리를 바짝 내린 소위 강철통신 <김영환>의 배신이다. 그때 나는 그의 모습을 보고 '강철통신'은 고사하고 '엿가락 통신'도 못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그런 넘이었다. 그의 골통과 뼈골에는 자유도 아니고 평등도 아닌 '사대주의'로 꽉 차 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넘은 몇 년 후 일본을 빠는 뉴라이트가 되어 또 한 번 거짓통신으로서 국민들을 현혹시켜, 이명박 같은 천박한 정권을 이 땅에 탄생시켰다. 물론, 당시 나 역시 우리가 한 시대 영국이나 중국이 그랬던 것처럼 인류를 리딩할 이데올로기를 구축할 힘이 없음을 슬퍼한 적이 있다. 그러나 조금 느리게 가더라도 우리 존재를 기반으로 하는 신념구조를 갖추어 나가기를 열망했다.
그런 점에서 유시민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기존의 이분법적인 체계를 허물고 독창적인 자신의 사상을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가이자 사상가로 위치할 자질을 갖추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에게는 50년 생을 관통해 흐르는 단심이 엿보인다. '불온한 자유' 와 '유연한 진보' 가 가리키고 있다고 보여지는 자유와 평등에 대한 등위적 평가, 그리고 그에 대한 확신 같은 것 말이다. 그 속에 그의 사상이 있고 국민에 대한 예의와 사랑이 있다고 나는 보고 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바로 당신에게 최초로 던져진 질문,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하고 물었을 때 둘 다 좋아, 하고 대답했던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대답해야한다. 자유도 좋고 평등도 좋다고, 우리가 삶의 품격을 좀 더 높이려 한다면 그렇게 해야한다고. 아마도 그것이 유시민이 추구하는 자유롭고 공정한 나라, 질 높은 시민이 사는 대한민국을 우리 눈앞으로 끌어당기는 일이 될 것이다.
(꼬리) 제목을 선정적으로 단 것을 혜량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그렇게 지은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보다 많은 시선을 당기기 위해서이고요^^* 다른 하나는 혹 이 글을 퍼 다가 다른 곳에 알리려고 하는 분이 계시면, 새로운 제목을 다는 데 쓸데없는 낭비를 줄여 드리려는 배려랍니다. |
'유시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0) | 2009.01.05 |
---|---|
유시민의 소셜 리버럴 1 - 세모난 동그라미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0) | 2008.12.25 |
유시민 '참여정부는 사회자유주의였다' (0) | 2008.12.22 |
유시민, 민주주의를 꿰뚫다. (0) | 2008.12.20 |
100분토론에서 본 유시민 (0) | 2008.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