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주권모임"
멸문지화를 맞았던 "노무현 가문"의 찬란한 부활
2002년 "화염병을 들고 바리케이드 앞에 선 심정"으로 사자후를 토하던 유시민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개혁당의 창당취지는 크게 2가지였다. 첫번째는 "노무현 지키기"였고, 두번째는 "국민참여정당 건설"이었다. "노무현 지키기"만이 개혁당의 목적이었다면 굳이 개혁당에 입당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요, "노무현"이 없는 "국민참여정당"이라면 나는 "노무현"이 있는 민주당에 입당하였을 것이다.
유시민이 수많은 잔류개혁당 안티들(요즘 시민광장 게시판에 출몰하는 전개혁당원이라는 이가 아마도 그때 양산된 안티들 중 하나였을 거다)을 양산하면서, 개혁당을 해체하고 열린우리당에 개별 입당하자는 안을 밀어붙였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국민참여정당을 제대로 실험하고 꽃피우려면 금뺏지 많은 당시의 민주당 탈당파가 중심이 된 열린우리당에 합류하는 것보다 개혁당에 남아있는 쪽이 훨씬 수월하고 효과적이었을텐데 말이다. 노무현이 지배하지 않지만, 노무현을 지도자로 모시는 그런 힘 있는 당이 필요해서, 그리고 그 당을 국민참여정당으로 만들어내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물론 그 시도는 좌절됐지만 말이다.)
시민주권모임에 대해서, 혹시 친노신당 하려는 사전 정지작업이 아니냐, 또는 그 자체가 하나의 신당이 아니냐 라는 의혹과 불안, 또는 기대에 섞인 시선들이 있다.
의혹과 불안은 민주당, 한나라당이나 언론 쪽의 몫이고, 기대섞인 시선들은 범노무현 지지자들의 몫이다. 나는 시민주권모임은 친노신당이기도 하고, 친노신당이 아니기도 하다 라는 선문답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1. 시민주권모임은 노무현당이다.
시민주권모임이, 심지어 노무현 정부 때에도 단 한번도 현실화되지 않았던 이른바 노무현 지지세력의 명실상부한 정치결사체이자 총집결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시민주권모임은 노무현당이다.
사실 노무현 정부동안 소위 친노세력은 단 한번도 조직적인 단일대오를 형성한 적이 없다.
대선 때는 민주당과 개혁당으로 분산되어 있었고, 열린우리당 안에서는 참정연과 초기 국참연(이는 결국 타락하여 반노로 변했다), 그리고 의정연 등으로 분산되어 있었다. 2007년 대선 때 비록 이해찬 후보를 중심으로 단결을 했다고 하나 한달도 채 안되는 일시적인 연대였고, 이해찬 후보의 패배 이후 결국 노무현 가문은 뿔뿔이 흩어져 멸문지화에 가까운 상황을 맞게 된다.
그랬던 노무현 가문이 시민주권모임으로 찬란하게 지금 부활한 것이다.
참여인사 면면을 보면 이건 뭐 빠진 친노인사를 찾기 힘들 정도로 노무현 가문의 거의 모든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 공동대표는 참여정부 때 두 실세총리였던 이해찬, 한명숙이고 내일 준비위원회 발족식 때는 문재인의 "대국민 제안문" 발표로 대미를 장식한단다. "노무현 가문"의 부활을 알리기에 한 치의 부족함이 없는 의식이다.
시민주권모임의 첫번째 사업이 경남 양산 재선거 지원이다. 시작부터 화끈하다.
정치적 논란 이런 거 개의치 않는다. 시민주권모임은 "탈정치"를 표방하지 않고,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표방했다. 이런 면에서 볼때, 시민주권모임은 노무현당이다. 노무현의 가치와 노무현의 사람들을 대표하는 정치결사체라는 점에서, 여지껏 단 한번도 현실화된 적 없었던 순도 99%의 노무현 가문의 정치결사체다.
2. 시민주권모임은 노무현당이 아니다.
상징적인 의미로 볼때, 시민주권모임은 노무현당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시민주권모임은 노무현당이 아니다.
시민주권모임에는 노무현 가문의 자손이자만 다양한 입장에 처해 있는 이들이 모여 있다. 민주당 최고위원도 있고, 참여신당 최고위원도 있다. 이해찬과 유시민은 지금 무소속이다. 운영위원을 잘 살펴보면 혹시 창조한국당 당원인 이가 있을 수도 있을 거다. (확인한 바는 없다)
시민주권모임은 정당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2중 당적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국가다. 민주당 당원과 참여신당 당원과 무소속들이 공존하고 있다.
주요한 정치적 선택 때마다 당적에 따라서 구성원들의 입장이 첨예하게 달라질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는 시민주권모임이 어떤 특정한 입장을 내놓을 수 없을 것이다. 만약에 공직선거에 시민주권모임 회원이 출마한다 하더라도 그 출마자의 선거벽보에는 시민주권모임의 이름이 아닌 소속 정당 또는 무소속의 이름으로 기재되어 있을 것이다.
일부에서는 시민주권모임이 내년 지방선거 전 범친노신당 창당을 목표로 출범하는 조직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내가 생각하건데 이 조직이 그대로 정당으로 발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정당으로 발전하기에는 내부 구성원들의 당적이나 생각들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당정치 안하고 시민정치 하겠다" 라는 이해찬 총리의 말이 대국민 사기극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혹시라도 이 조직이 내년 지방선거 전에 창당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면 나부터 앞장서서 결사 반대할 것이다.
3. 시민주권모임의 롤모델이 미국의 무브온이라고 하지만, 한국의 특성상 미국의 무브온처럼 되기는 힘들 것이다. 시민주권모임의 활동이 결과적으로 2년 후 쯤 새로운 정당의 토대가 되리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2008년 미국의 "오바마 신화"는 한국과 다른 조건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즉, 미국의 오바마신화는
1) 하워드 딘이 의장으로 취임한후, 지속적으로 풀뿌리 네트워크와의 연계를 강화하며 개혁에 성공한 민주당이라는 야당
2) 무브온이라는 일반시민들의 자발적이고도 광범위한 풀뿌리 시민정치 네트워크
3) 오바마라는 희대의 상품성과 매력적인 정치 철학을 가진 정치인의 존재
이 3박자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근데 불행히도 우리나라에는 3번(누군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은 존재하지만 1번도 2번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 한국에서 오바마가 나온다면 민주당 내의 반노세력들이 앞장서서 그 오바마를 짓밟아 죽여버릴 것이다. 무브온만한 풀뿌리 시민정치 네트워크도 없다. 시민정치 네트워크가 절정에 달했던 2002년 2004년에조차 그 힘은 미국의 무브온이 미국에 끼친 영향력이나 힘보다 약했다. 그랬기에 노무현이 그렇게도 흔들렸던 거다.
결론은, 우리나라의 특성상 1번과 2번이 상호 분리되서 진행될 수 없다는 것이다. 2번을 추구하면서 1번을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과 지금의 민주당을 미국 민주당 수준으로 견인하는 압력 또한 꾸준히 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민주권모임이 완전한 "탈정치"를 선언하고, 시민주권모임의 회원들이 "현실정치 불출마"를 선언한다든지 이런 것은 바보같은 일이다.
4. 민주당 내 친노세력, 시민주권모임, 그리고 참여신당의 역할분담
민주당은 어찌됐든 호남 지역기반을 바닥에 깔고 있다. 민주당은 절대 소멸될 수 없다. 이것은 사회학적, 인구학적, 역사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2004년 탄핵 때처럼 호남에서 민주당이 거의 압살을 당하는 그런 일은 앞으로는 벌어지기 힘들단 말이다.
그렇다고 지금의 민주당을 민주진영의 중심으로 계속 끌고 갈 순 없다. 민주당은 개혁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민주진영의 대표 자리에서 끌어내려야 한다. 민주당 내 친노세력은 그 역할을 해야 하는 거다.
사실 정세균 대표 취임 이후 민주당은 점진적으로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국회의원 구락부에 호남기반 지역정당이라는 그 당의 태생적 한계를 고려하면 정세균 대표와 민주당 내 친노세력들은 할만큼 했다고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과거 유시민이 강연회에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수준 낮은 거대야당 한나라당이 계속 대한민국의 전진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은 한나라당의 수준이 높아지는만큼 전진할 것이라고.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이 어찌됐든 지금 가장 큰 세력과 위상을 민주진영 내에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민주진영 전체의 수준 또한 민주당의 수준에 좌지우지된다. 이런 면에서 민주당 안 친노세력들의 민주당 개혁의지를 변절자 또는 허황된 망상으로 몰아붙일 일은 아니다.
참여신당은 "국민참여정당"이라는 깃발을 묵묵히 들고 당분간 상향식 정당실험을 계속 해야 한다. 사실 개혁당 이후로 상향식 정당실험은 그 명맥이 끊겨버렸다. 열린우리당에서는, 상향식 정당을 실험하고 안착시키긴 커녕 상향식 정당의 최소한의 토대라도 지키기 위해서 투쟁해야 하는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참여신당에는 당 하나를 집어삼킬만한 정동영같은 유력 정치인이 없기 때문에 상향식 정당 연구와 실험을 하기에는 최적의 구조다. 그 자체로서도 참여신당의 존재의의는 크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유시민이 현 시점에서 참여신당에 합류하는 것을 반대한다. 이 부분은 다음에 본글로 또 쓰겠다.)
개인적으로는 참여신당이 목표나 라이벌을 민주당으로 설정하지 말고, 이미 상향식 정당과 정책 정당의 모습을 어느 정도 갖춘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으로 설정했으면 좋겠다. 그 쪽이 민주당이나 과거 열린우리당보다 훨씬 참고하거나 배울 점이 많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위상이나 세력적으로 봐도 그렇고 말이다.
시민주권모임은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서서히 붕괴된 시민주권 네트워크의 사회적 토대를 부활시키는 역할을 당분간 할 것이다.
사회적 토대 없이 좋은 정당과 좋은 언론은 절대로 만들어질 수 없다. 유럽의 진보정당들은 강력한 노동조합이라는 토대가 있었기에 태동과 집권이 가능했다. 개혁당과 열린우리당이 노사모라는 사회적 토대 없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한겨레신문의 창간이 6월항쟁 없이 가능했을까?
그리고, 그 사회적 토대가 형성된다면, 그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다. 민주당을 노무현 가문이 접수할 수도 있는 거고, 국민참여정당을 조건으로 민주당, 노무현 가문, 참여신당이 한데 모여 당을 같이 할 수도 있다. 민주당이 끝까지 개혁을 거부하면 노무현 가문끼리 모여 "진짜 노무현당"을 창당할 수도 있다.
어쨌든 이것은 최소 2년 이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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